▲당시 맹인 여아들의 모습.

청말 광저우 거리에는 맹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선천적으로 맹인이 된 것이 아니었다. 아기 때 부모의 위생상태가 좋지 않아 감염되거나, 천연두 또는 장티푸스 등을 앓은 후 영양 부족으로 서서히 눈이 실명된 경우가 많았다. 간혹 눈병이 나는 이들도 있었지만, 간단한 치료조차 하지 않고 방치되어 있다 시력을 잃는 안타까운 사례들이 많았다. 그래서 피터 파커 선교사가 세웠던 첫 서양식 의원도 안과 병원이었다. 또 맹인들을 위한 체계적인 요양 겸 특수학교가 광저우에 비교적 빨리 세워진 요인이 되었다.

중국 최초의 맹인학교는 1874년 스코틀랜드 장로회가 북경에 연 고수통문관(瞽叟通文馆)을 효시로 본다. 그러나 맹인들을 위한 본격적인 특수교육은 명심서원(明心书院)을 시작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명심서원은 메리 나일스(Mary Niles, 1854~1933) 선교사가 1889년 설립한 화남지역 최초의 맹인학교였다.

▲메리 나일스 선교사는 중국에 온 최초의 서양 여의사이자 특수교육 전문가였다.

그녀는 1882년 광저우로 파송된 최초의 여의사 선교사였다. 당시 미국에서도 남녀 차별이 심해 여자 외과의사가 활동한 것은 1870년대부터였는데, 중국은 이미 1880년대에 여의사로부터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광저우에 온 뒤 나일스 선교사는 박제의원의 부녀 병동 책임자로 일했다. 그녀는 북미장로회 소속으로 박제의원 근처에 있던 진광여학교의 헤리어트 노예스 선교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중국어를 배웠다. 진광 여학생들의 주치의 역할도 했다. 또 농촌의 진료소 등을 찾아다니며 의료순회 사역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광저우 시내와 외곽 곳곳에 그녀가 개척한 진료소가 꽤 되었다. 나일스 선교사는 28살 처녀의 몸으로 와서 1928년 74살로 퇴직하기까지 46년간 중국 여인들과 장애 아동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다.

1889년 어느 날 사람들이 쓰레기더미에서 죽어가는 3살의 맹인 여아를 발견하고 박제의원으로 데려왔다. 나일스 선교사는 그 아이를 극진히 치료해 살려낸 후 길렀다. 진광 여학교 기숙사를 빌려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3명의 맹인 여자아이들도 데려다 키웠다. 그 아이들은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는 아이들이었는데, 노예처럼 비참한 생활을 하다 병을 얻어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그녀는 1899년 그동안 해 왔던 15년간의 박제의원 여성 전문부서 의사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맹인 아이들을 위한 사역을 시작했다. 의사에서 맹인들을 위한 특수교육 분야로 뛰어든 것이다.

미국 언론에 광둥 거리의 비참한 맹인 여자아이들을 소개하는 글을 실어, 여성들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미국 쪽 도움을 받아 단마이 여사를 명심서원에 초빙했다. 단마이 여사는 맹인 목사로, 독일 베를린의 한 고아원에서 점자 교육과 직물기술을 가르친 특수교육 전문가였다. 설립 초기부터 맹인 전문교사가 맹인 학생들을 가르친 것은 특수교육의 좋은 선례를 남겼다. 명심서원은 단순히 장애 아동들을 수용해서 돌봐주는 고아원 차원이 아니라, 맹인 아이들이 자립할 수 있는 재활에 중점을 두었다.

▲옛 명심서원은 요양원이자 학교여서 규모가 꽤 컸다.

처음에는 여자 아이들만 받다가, 나중에는 남자 아이들도 들어왔다. 학생 수가 늘어나 1912년 명심로에 건물을 지어 옮기게 되었다. 명심로는 켈 선교사가 세운 혜애정신병원이 있는 곳으로, 명심서원과 정신병원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나일스 선교사는 켈 선교사의 부인인 마샤 여사와 동역의 교감을 자주 나누었다.

여성을 위한 여성의 사역

서양 선교사가 하는 보통의 미션스쿨도 사람들의 의혹을 받는 상황 속에서, 맹인 여아들을 위한 이런 일들은 사람들의 불신과 오해를 받기 일쑤였다. 주일학교에서도 여자아이들을 모아 배에 실어 외국에 팔아버린다는 헛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러나 여성 선교사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가 의사로 있으면서 살려낸 많은 여자 환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었다. 그러면 당시 중국으로 왔던 여자 선교사들에 대해 살펴 보자.

▲명심서원은 현재 초등학교 내에 유적지로 한 동만 남아 있다.

19세기 광저우 선교의 특징 중 하나가 미국 여성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참여였다. 19세기 중반에는 미국에서조차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남북전쟁 후 전문적 여성 선교회가 만들어졌고, 1871년부터는 ‘여성을 위한 여성 사역’이라는 잡지도 발간되었다. 북미장로회 총회 내에서도 여성위원회가 만들어져 여성과 아동을 위한 사역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외 여성 선교에도 후원자가 줄을 이었다. 남성 중심의 선교 사역 트랜드가 전환점을 맞았다. 1866년 이전까지만 해도 여성 선교사는 전무했다. 주로 선교사 부인 자격으로 같이 동역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1867년부터 1897년까지, 257명의 선교사 중 75명이 독신 여성이었고, 선교사 부인이 72명이었다. 여성이 절반을 넘어섰다.

처음부터 여선교사들의 중국 내 사역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당시 중국은 남녀를 구별하는 봉건사상이 강했고, 서양에 대한 반감까지 겹쳐 초기에는 여선교사들도 같은 여인들에게 다가가기 쉽지 않았다. 초창기 여선교사 일기에 보면 “매일 우리들은 길을 따라 왔다갔다 걸어 다녔고, 현지인의 초청을 받아 그들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희망했다. 우리가 중국인에게 가까이 가면 열려 있던 문마저 닫히고, 거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부녀자들도 서양 귀신이라 소리치며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오랫동안 현지인과 말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나일스 선교사는 박제의원의 여의사로 있으면서 많은 여성과 아동 환자들을 전담했다. 여의사가 오자 병원에 오기를 꺼리는 고위 관료들의 부인과 아이들 위한 왕진 요청이 잇따랐다. 나일스 선교사는 1884년부터 일반 가정집을 직접 방문해 여성들의 출산을 돕고 산부인과 치료도 했다. 당시 중국 전통 의학은 맥을 짚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나일스 선교사의 왕진 서비스는 인기가 높았다. 1884년에는 6건의 방문 요청이 있을 뿐이었지만, 1890년에는 164건, 1896년에는 508건의 환자들이 나일스 선교사를 자신들의 집으로 불렀다. 들어가기 힘들었던 중국의 가정집을 자연스레 출입하게 된 나일스 선교사는 진료를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환자는 가난한 사람부터 광둥성장 부인까지 다양했다. 가족을 잘 치료해 주는 서양 여의사에게 고위 관리들과 군인들은 감사해했다. 많은 선물을 보내고 각지에 진료소를 개설하는데 물질적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명심서원 또한 이들의 도움과 지지로 세울 수 있었다.

▲명심서원의 정면. 광저우시 보호문물 안내판이 붙어 있다.

중국어 점자 교본을 만들다

나일스 선교사는 1854년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로회 선교 일을 했으며, 그녀는 뉴욕 여성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남북전쟁에도 참전한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어머니가 다섯 살에 죽어 줄곧 할머니 손에서 외롭게 자랐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어린 여자아이들에 대한 긍휼함이 많았다. 봉건시대 말 중국 여성들의 삶은 얼룩졌다. 남존여비 사상으로 정상적인 아이들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강물에 던져져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여아들의 운명은 위태로웠다.

나일스 선교사는 맹인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스스로 점자를 배우고 연구해 그것을 다시 번역하는 등, 중국어로 된 점자 교본 및 점자 교재 식별시스템을 만드는 데 각고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교재를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점자로 쓰인 성경을 읽게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끔 악기와 직물 짜는 기술, 혹은 죽공예품 등의 기술을 가르쳐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명심서원은 1908년부터 1934년 동안 114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학생들은 교사, 특수 교육 담당자, 의료 방면, 공예업자, 전도사 등으로 자신의 진로를 찾았고, 서로 결혼도 해서 생활도 안정되었다. 명심서원이 건립되고 관청의 주목과 후원을 받게 되자, 화남 각지에 비슷한 기관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

명심서원의 자취는 방촌의 도리(桃李)초등학교 안에 남아 있다. 학교 운동장을 지나자, 낡은 3층 건물이 구석에 서 있었다. 유적지로 남아 있는 명심서원 건물은 3층의 고딕 양식으로 된 붉은색 벽돌 건물로, 교학동으로 쓰이던 것이다. 이 건물은 2001년 철거될 위기에 처했으나, 명심서원의 가치를 알고 있는 각계각층의 반대에 의해 시 보호문물로 지정되었다. 입구에는 문화재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명심서원의 유래를 알려주는 안내문이 새겨져 있었다.

▲명심서원 복도 모습. 문턱을 없애고 바닥을 올록볼록하게 깔아 맹인 아이들이 미끄러지는 것을 막았다.

안으로 들어갔다. 각 방 문들과 계단들을 빨간 색으로 조악하게 칠해,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더 오래된 건물의 풍상을 말해주고 있었다. 바닥은 나무로 깔려 있었고, 복도 폭을 좁게 해 맹인 아이들이 벽을 잡고 다니기 편하게 설계돼 있었다. 현재 건물 일부를 초등학교 직원들의 숙소로 이용하고 있었다. 중국은 건물이 문화재 등으로 지정되어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명심서원은 50년대 초 정지되고 맹인요양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운영되었다. 건물은 한동안 비어 있다가 60년대 문화 혁명기에는 공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전에 명심서원은 맹인 아이들이 같이 생활하는 학교이자 요양원이었다. 그래서 꽤 큰 건물들이 몇 동 이어져 있고 앞에 잔디밭이 있었다. 명심서원 건물은 20세기 초 맹인 장애 아동을 위한 내부 설계를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어린 아이들의 보행이 편하게 방바닥을 모두 나무로 깔았고, 같은 방향으로 깔아 넘어지지 않게 했다. 또 올록볼록 평평하지 않게 깔아 미끄럼을 방지했다. 그리고 각 방의 문턱을 없앴다. 중국인들은 복이 문턱을 통해 들어온다고 믿어 문턱을 중시했다. 그런데도 과감하게 문턱을 없앤 것이다. 명심서원의 맥은 현재 천하(天河)구의 광저우 맹인학교가 이어가고 있다.

학교 뒤편에 고딕식 건물들이 있었는데, 명심서원의 부속건물 같았다. 현재 소경들의 아파트로 사용되고 있다. 명심로 부근은 지금도 맹인들과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가 꽤 있어 맹인 거주 지역으로 지정됐다. 이곳은 이웃돕기 카드제를 운영하여 다른 지역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혼자 사는 맹인 노인들은 도움을 받을 일들을 카드에 써서 현관 앞에 내 놓으면 정상인 이웃들이 도와주는 제도이다. 건물은 이미 제 기능을 잃었지만 선교사들이 행한 사랑과 선행은 세월이 흘러도 전해지고 있었다.

▲명심서원의 뒤를 이은 광저우 맹인학교의 현재 모습.

맹인 아이들과 평생을 같이 한 그녀를 동료들은 이렇게 말했다. “메리 나일스는 고통과 아픔으로 가득 찬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빛과 위안, 무엇보다 사랑이 담긴 따스한 가슴을 데리고 나왔다.”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