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1.1.1. 핍박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 285년부터 4두 정치를 시작한 황제 디오클레치안은 기독교를 저해하고 전멸시키는데 있어 악명 높은 인물로 불립니다. 기독교 저자인 락탄티우스(c.240-320)와 다른 기독교 저자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대’라는 말을 덧붙여 ‘대핍박’이라 부르고 있죠. 그 이유는 당시에 17,000여명이나 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한달 만에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죠?”

“교수님, 저 질문이 있는데요. 정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는지요?”

“믿을 수 없기도 한 숫자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이렇게 많은 순교가 있었다고 하는 역사적 자료는 『교황들의 책』(Liber Pontificalis)에서 나온 것입니다. 황제 디오클레치안이 극심한 칙령을 발표하여 잔인한 폭력과 살인을 감행한 것은 사실입니다”

▲르노드 바가 14세기 초에 쓴 『교황들의 책』
“당시 황제 디오클레치안은 제국을 연합하기 위해 ‘정복 당하지 않는 태양’(Sol Invictus) 사상을 증진시켰습니다. 그는 주피터와 헤라클라스와 같은 전통적 신들을 섬겼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4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제국 내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각양 단체들과 개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먼저,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신성 모독자들이라고 정죄하고 유대지역으로부터 그들을 추방시켰습니다. 한편 로마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과거에 황제 네로 시대에 방화범으로 혐의를 받은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당시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인류를 증오하는 자들’이라고 여길 정도로 그들을 증오하기도 했습니다”

“황제 트라얀, 데시우스, 그리고 발레리안은 귀족 사회로부터 기독교인들을 배제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핍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기독교인들은 소수였지만 로마제국 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고, 제국의 고위직을 맡은 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로마제국 내에 여러 교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후 제국 내에 관용이 내려졌습니다”

“대핍박을 내렸던 황제 디오클레치안도 처음 19년 동안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다가 303년에 이르러 그는 대핍박을 시작하는 반기독교적 칙령을 세 차례나 선포했습니다. 왜 그가 그렇게 갑자기 다른 행동을 취했을까요?”

▲동전에 새겨진 갈레리우스
“황제 디오클레치안은 298년 모든 군인들과 제국 행정인들에게 신들에게 희생제를 드리라고 명령을 내렸고, 이 명령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직책을 박탈하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군인들의 불충성을 미연에 막기 위한 방편으로 기독교 박해를 시행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 두번째 이유로서 황제 디오클레치안은 자신의 시저로서 갈레리우스의 임명과 서방지역의 막시밀리안의 임명과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매우 증오했던 자였습니다”

“왜 그들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갈레리우스의 모친 로물라 때문입니다. 로물라는 독일 신들의 여사제였습니다. 그녀는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아들에게 물려준 셈이죠. 어떻게 대답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럼 계속해서 말씀드릴까요?”

“먼저 디오클레치안이 심복, 즉 시저인 갈레리우스는 303년 초 니코메디아에 주둔한 기독교 장군들과 공직자들이 이교 신들에게 희생제를 드리기를 거부하면서 군사적 복종을 거부하고 있음을 보고합니다. 처음에는 디오클레치안은 주저합니다. 약 10주 동안은 말이죠. 그러다가 갈레리우스의 보고에 따라 기독교인에 대한 철퇴를 가하게 됩니다”

“그 때가 바로 디오클레치안이 첫번째 칙령을 선포했던 303년 2월 24일이었습니다. 더욱이 황제 디오클치안이 반기독교적 칙령을 발표하게 된 세번째 이유는 자신의 개인적 종교심에서 일어납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전통과 제도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자였죠. 그런데 기독교인들의 수적 성장은 그에게 큰 위협의 대상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제국 제사장들이 그를 부추겨 기독교인들을 전멸시켜야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아내와 딸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측근 인물들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일들로 인해 디오클레치안은 기독교인들에게 불안함을 갖게 되었다고 믿어집니다”

“303년 첫번째 칙령으로 인해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성경책들과 예식서들을 압수하라고 하고 예배를 위한 모든 모임들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인들의 자유로운 삶을 제한시키고 통제했습니다. 명령에 거부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공직을 박탈했습니다. 그들을 범죄자들과 같이 취급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분들이 환난을 당했습니다”

“이제 두번째 칙령이 내려졌습니다. 그 때가 303년 여름이었죠. 첫번째 칙령이 내려진 약 한달 후에 니코메디아, 파라노이드에 있는 디오클레치안의 궁전에서 두번의 화제가 일어났습니다. 화재의 책임을 그는 네로처럼 기독교인들에게 돌렸습니다. 심지어 희생제를 드리지 않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검거했는데 그 가운데 자신의 아내와 딸까지도 포함되었습니다. 모든 기독교 성직자들을 검거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수많은 고백자들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들 중 니코메디아 감독 안티무스는 다른 기독교인들과 함께 끔찍하게도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또 아르메니아와 시리아 지역에 일어난 폭동을 기독교인들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수많은 분들을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배교하는 자들도 생겨났습니다. 그 가운데 로마감독 마르셀리누스는 성경책들을 내어놓는 배교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칙령으로 인해 신들에게 희생제를 드리기 거부하는 자들을 고문하고 희생제를 드리는 자들을 석방시켰습니다. 더욱이 304년 4월에 선포된 네번째 칙령은 죽어가는 디오클레치안으로부터 통치력을 장악하려는 갈레리우스의 계략이었습니다. 자신의 모친 로물라에게 부추김을 받은 갈레리우스 기억하시죠? 이 칙령으로 인해 역사가들은 디오클레치안의 핍박을 ‘대핍박’이라는 명명하게 된 것입니다. 정말 계속적으로 핍박에 대해서 말하는 저도 힘들게 느껴지지만 당시의 상황에서 살았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는지 상상하기가 힘들기도 합니다”

1.1.2. 여성들

“이 당시에 순교한 여성들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디오클레치안은 자신의 친척과 아내까지 죽이는 잔인성을 보였습니다. 그것에 관해 『위대한 여인들의 발자취』의 119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순교자 수잔나
293년 디오클레치안은 갈레리우스를 경계하기 위해 갈레리우스의 신임 받고 있는 청년을 자신의 딸 발레리아(Valeria)와 결혼하도록 했다. 그리고 293년 봄, 디오클레치안은 미혼으로 남아있는 자신의 가문의 여인인 질녀 수잔나를 갈레리우스와 결혼시키기 위해 약혼을 발표했다. 이 약혼 발표로 인해 한 가문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순교의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다.

디오클레치안이 선포한 약혼을 수잔나는 거부했다. 그녀의 부친인 가비우스와 삼촌인 카이우스도 그녀의 결정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헌신하도록 권면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삼촌들인 클라디우스와 막시무스는 수잔나를 설득시켜 갈레리우스와 결혼시키려고 노력했다. 하루 아침에 황후가 될 수 있는 길인데 왜 마다하느냐고 하면서 그녀를 설득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믿지 않는 두명의 삼촌도 그녀를 통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어느 날 장군 갈레리우스는 수잔나의 집을 방문하였다. 자신이 수잔나를 설득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방문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잔나는 완강히 거부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기독교인임을 알게 된 갈레리우스는 로마의 집정관 막케도니우스(Macedonius)에게 그 사실을 고발했다. 집정관은 수잔나를 로마 포럼으로 소환하여 주피터 신 앞에서 예식을 행함으로 제국을 위한 충성심을 발휘해 보라고 명했다. 하지만 수잔나는 거절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은 기독교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주피터에게 예식을 행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녀를 검거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황제 가문이기 때문이었다.

수잔나는 구혼도 거절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기독교인일 뿐만 아니라 자신은 이미 순결을 지킬 것이라고 맹세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디오클레치안은 자신의 질녀가 선포된 약혼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동로마제국 변방에 있으면서 접하게 되었다. 게다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녀가 결혼을 거부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는 분노하여 명을 내려 질녀를 처형토록 했다. 293년 보병대가 그녀의 집에 도착하여 수잔나를 참수시켰다. 그녀의 부친 가비우스는 검거되어 감옥에서 굶어 죽고 말았다. 막시무스와 클라디우스는 클라디우스의 아내 프레페디그나(Prepedigna)와 자녀들인 알렉산더와 쿠지아(Cuzia)와 함께 모두 순교하였다. 가문 중 살아남은 사람은 로마의 감독인 카이우스 뿐이었다. 그는 도주하여 카타콤에 몸을 숨겼다. 디오클레치안 가문 내에 자행되었던 살인은 기독교 교회에 반대하여 행한 최후의 대핍박을 예고했다”


▲아그네스를 기념하는 교회
“또 이 책에서 순교한 위대한 여성들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12세의 ‘아그네스’의 순교도 매우 감동적입니다. 그래서 후에 콘스탄틴 대제는 그를 기념하여 아그네스 교회를 건축하기도 했습니다”

“네 번째 칙령을 내린 갈레리우스는 305년 자신의 아우구스투스인 디오클치안을 대신하여 지도자로 부상하자 서방지역의 아우구스투스인 막시밀리안을 대신하여 콘스탄틴이 아우구스투스로 부상하게 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가장 어두울 때는 동녘에 해가 뜨기 직전인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호소가 하나님께 달하게 출애굽이 일어난 것처럼, 이제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에게 자유의 물결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지금까지 ‘대핍박’이라는 강의를 듣는 성민은 당시의 기독교인들의 삶이 어땠을 지에 관해 궁금했다. 왜냐하면 늘 죽음을 직면했던 그들의 일상생활은 과히 상상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현재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이러한 위기 속에 살고 있는 것도 생각하게 되었다. 정말 신앙을 고수하는데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주님께 드렸던 순교자들의 신앙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다짐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초대교회의 ‘핍박들’이라는 주제를 다뤘습니다. 핍박들이란 주제에서 10가지 핍박들을 로마제국과 연계시켜 설명드렸습니다. 여러 명의 이야기들을 했기에 복잡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간략하게 요약해 드리도록 하는 것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어집니다. 먼저 핍박은 로마제국 황제 네로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간헐적이고 지엽적으로 핍박은 황제의 정책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대대적인 순교자가 일어난 시대가 8번째 핍박 시기인 3세기 후반 황제 데시우스 시대였습니다. 이때에 교회의 순결성에 대한 문제가 발생해서 카르타고 감독 키프리안은 교회론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 초에 이르러 ‘대핍박’이 있었습니다. 황제 디오클레치안은 3차례의 칙령, 그의 후계자 갈레리우스가 선포한 네번째 칙령으로 정말 수 없는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시대에 활동했던 분들, 즉 교부들이 1-2세기, 즉 『명상록』을 쓴 황제 아우렐리우스시기까지의 교부들을 가리켜 ‘속사도’ 또는 ‘사도적 교부들’이라고 명합니다. 그 이후의 교부들을, 즉 2-3세기의 교부들을 ‘변증가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이해가 되지요. 속사도는 아직도 핍박이 강하게 일어나지 않았을 때이고, 변증가들은 핍박이 강하게 일어났을 때와 연관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초대교회에 나타난 다른 주제, 즉 ‘교부들’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로~아우렐리우스 (1-2세기) _______________ 세베루스~디오클레치안(2-4세기초)
속사도 또는 사도적 교부들 _______________________ 변증가들

‘교부들이라, 교부들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성민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정말 이렇게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지속적으로 행해도 될까?’하며 걱정했다. 하지만 교수님의 강의 속에서 하나의 희망을 갖는 것은 신앙의 선배들인 교부들의 가르침을 통해 신앙의 새로운 모습을 다시금 가다듬을 수 있다는 것이다.

라은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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