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지역 많은 신자 가정에서
예술가, 특히 서양화가 배출돼
한국인 문화적 감수성 접목도
침묵에 빠진 조선 흔들어 깨워

서성록
▲평양 오월회 동인들. 오른쪽부터 현리호·최연해·박영선·권명덕(동아일보 1932. 5. 29일자). ⓒ서성록 교수 제공

기독교 선교사들이 정착한 개화기 평양은 한양과 더불어 문화활동이 가장 적극적이던 지역이었다. 선교사들은 조선의 악습인 반상(班常)의 구별을 없애고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기회균등 사상을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음악·문학·미술 등 신문화에 대해 눈을 뜨게 했다.

이 시기 눈길을 끄는 것은 선교사들의 기독교 학교 설립이다. 1906년 평양 지역에만 13개 학교 281명의 학생에서, 1907년 1년 만에 17개 학교 473명으로 성장했다. 선교사 앨머 케이블(Elmer M. Cable)은 이 현상을 가리켜 ‘교육혁명’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베어드 선교사(William M. Baird)가 설립한 숭실고보(숭실학당)와 제임스 홀 선교사(William James Hall)가 설립한 광성고보(광성학교)를 들 수 있다. 평양고보가 관립이라면 두 학교는 미션스쿨이라는 점에서 건립 성격이 확연히 구별된다.

이들 기독교 학교에서는 성경·영어·물리·화학 등 서양 근대 교과목을 가르쳤다. 이는 당시 한국의 개화 또는 근대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기독교 학교에서는 신문화를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보급했다. 유능한 지도자뿐 아니라 예술적으로 재능이 있는 사람을 키워내는 ‘인큐베이터’ 구실을 한 셈이다.

평양은 서화예술의 전통이 오래 됐고, 근대기 개화 분위기가 가장 고조된 지역 중 하나로 초기 서양화 유학생들을 배출했다. 그 촉매제 역할을 했던 것은 1925년 창립된 미술교습소 삭성회(朔星會)로, 서양화 김관호와 김찬영, 동양화 김윤보와 김광식이 강사로 나섰다. 삭성회는 만 2년 수업 기간 동양화부와 서양화부로 나눠 학생 20명과 30명씩을 모집했다.

그 결과는 곧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조선 총독부 주최 ‘조선미술 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이하 조선미전)’는 전국에 산재한 신인의 등용문 역할을 했다. 그런데 1927년 제6회 ‘조선미전’에 평양 박인철의 <풍경>, 장승엽의 <교회 가는 길>, 최세영의 <습작>이 서양화부에서 동시에 입선에 오른 것이다. 삭성회 창립 2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숭실중학교 출신 권명덕은 한 해 앞선 1926년 제5호 조선미전과 제6회 조선미전에서 수채화 <풍경>과 유화 <자화상>으로 입선했다. 1930년대 평양은 한양 못지 않게 서양화가들이 상당수 있었고, 이는 평양에 신문화에 대한 바람이 컸고 이를 적극 수용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장 서구적이랄 수 있는 서양화가 수백 년 누적된 동양화를 제치고 인기 있는 예술 분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이런 원인에 기인한다.

1932년 제11회 조선미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사람은 단 세 명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이 평양의 최연해(광성고보)였다. 함께 특선을 받은 수상자는 이마동과 이인성 등 장래가 촉망받는 화가들이었다.

함께 입선한 평양 출신 화가로는 권명덕(숭실중학교), 박영선(평양고보), 현리호(숭실중학교)가 있다. 동아일보는 ‘평양의 자랑, 오월회 동인 4명이 전부 미전에 입선(1932. 5. 29일자)’이라고 보도했다. 이들은 나중에 ‘오월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평양 화단에는 두 부류가 있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작가들 모임과 국내파들의 모임이었다. 전자는 윤중식(숭실고보), 문학수, 이중섭, 황염수, 이호련, 김병기(광성고보) 등이며, 이들은 개별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면서 평양 체신회관에서 단체전을 갖기도 했다.

이보다 응집성이 강한 사람들은 ‘주호회(珠壺會)’ 회원들이었다. ‘주호’는 광성고보 2학년을 중퇴하고 독학하다 요절한 최지원의 아호로, 그는 제18회(1939) 조선미전에 목판화 ‘걸인과 꽃’을 응모해 입선하기도 했다. 당시 “선과 구상에 소박성있는 목판화(심형구, 제18회 조선미전인상기, 동아일보 1939. 6. 11일자)”라는 심사평을 받은 이 작품은 깡통을 든 소년이 지나가는 소녀를 응시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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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조선미전에 입선한 최지원의 목판화. 요절한 최지원을 기리기 위해 광성고보 학우들을 중심으로 주호회가 탄생되었다. 최지원, 걸인과 꽃, 목판화, 62.5x47.5cm, 1938. ⓒ서성록 교수 제공

‘주호회’ 동인으로는 최영림·황유엽·변철환·홍건표·장기표·장리석·박수근 등이 있는데, 최영림·황유엽·장리석·변철환은 광성고보 미술부에서 함께 꿈을 키웠던 학우들이었다. 이들은 국민화가 박수근을 화우로 맞이했는데, 향토적인 분위기와 서민에 대한 관심 등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양구 출신의 박수근을 영입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주호회는 1940년 결성 후 1944년까지 활동했으며, 모두 5회에 걸쳐 동인전을 열었다. 이들 역시 시차를 달리하며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당시 화가들의 동인전이 드물던 시절, ‘오월회’와 ‘주호회’ 주도로 평양 지역에 신문화를 보급하였다.

숭실고보에서도 화가들이 나왔지만, 상대적으로 광성고보에서 미술가들이 많이 배출됐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평양에는 장로교회가 감리교회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감리교 계열의 광성고보가 장로교 계열의 숭실고보다 많은 미술가를 배출한 데는 장로교단이 교회 건립과 복음 전파에 주력한 반면 감리교단은 학교와 병원 건립, 그리고 문화를 통한 선교에 비중을 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또 한 가지 요인으로는 김병기의 증언처럼 광성고보에는 주로 ‘부잣집’ 아이들이 진학해,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미술을 하려면 국내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재료를 사용해야 했는데, 일본산 물감을 구입하는 것은 서민들에게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김병기가 광성고보에서 수학했으므로, 그의 말은 신빙성이 높은 편이다.

그 학생들은 미술에 흥미를 느끼고 신문화에 적극성을 띠었다. 광성고보 미술반원으로 활동했으며 나중에 일본대학 예술과를 나온 계삼정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각 학교마다 미술반 활동이 상당히 활발했습니다. 매년 대규모 교내 전람회가 열릴 때면 평양 유지들이 와서 구경하는 등 성황을 이뤘지요. 그때 미술반 학생들이 평양 중심의 ‘서부학생미술전람회’에 출품하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주최 ‘전국학생미술전람회’에는 학교마다 경쟁이라도 하듯 입상도 하고 그랬지요(김복기, 월남작가들의 스승 월계(月桂) 계삼정, 2021. 4).”

광성고보에서는 황유엽·최재근·김승기·최영림·계명철·변철환·홍종명·김창렬·장종선 등이 배출됐다.

평양 많은 신자들의 가정에서 예술가들이 배출됐는데, 길선주 목사의 아들 길진섭(숭실중학교), 박종은 목사의 아들 박고석(숭실중학교),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한 김병기(광성고보), 김학수와 송혜수, 김원(숭실중학교) 등을 키워내면서 평양을 ‘개화의 요람(김복기)’으로 만들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전래된 기독교는 한국 근대화에 영향을 미쳤다. 민족 복음화에 기여한 것은 물론이고 의료, 한글 보급, 현대식 교육 등 우리 생활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이 허다하다.

그 영향 중 지극히 작은 부분 중 하나가 ‘서양화’의 출현인데, 예술 분야의 등장이라는 단순한 측면 외에도 평양 화단에서 볼 수 있듯 한국인들의 문화적 감수성을 접목시키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깊은 침묵에 빠진 조선을 흔들어 깨운 것은 한반도를 뒤흔든 총성이 아니라,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의 교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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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록 교수.

서성록 명예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