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는 질문이 적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자칫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질문들의 배경과 의미들을 찾아보는 칼럼 ‘20 Questions in Old Testament’입니다. 지난 편에서 이어집니다. -편집자 주

바벨론 포로
▲당시 바벨론 성 입구 상상도. ⓒ필자 제공
시편 속 질문:
5.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시편 137:1-9)

◈바벨론의 강가에서… 망각과 기억의 긴장(tension) 사이에서

그 땅에서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엄청난 것들이었다. 바벨론이 일으킨 그들의 문명은 유다 포로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바벨론은 흔히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 문명 위에 제국을 건설했다.

독일 베를린 박물관 속 페르가몬 박물관(Pergamonmuseum)에 이쉬타르(Ishtar, 아스다롯, 여신)의 문이 있다. 이는 B.C. 587년경 느부갓네살 2세에 의해 왕국의 동쪽에 지어진 8번째 성문이었다. 20세기 초 발굴된 벽돌들을 가지고 박물관에 복원한 것이다.

그들의 신들이었던 마르둑(Marduk), 이쉬타르(Ishtar)를 경배하기 위해서였다. 푸른 빛을 띠는 벽돌들, 황금빛 나는 오록스(Aurochs, 소의 모습)를 비롯한 동물들이 새겨진 모습과 그 크기는 당시 유다 포로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페르가몬 박물관에 전시된 그 문을 보면 사람들을 압도하는 높이와 크기, 그 문명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그들은 전쟁 포로로 잡혀 왔고 강제 노역을 당하는 노예들일 뿐이었다. 편안하게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바벨론 문명을 본 이들은 결단코 그곳을 헤어날 수 없다는 절망과 자괴감에 빠지 않을 수 없었고, 무언가를 새로이 시도할 수 있는 상태도 전혀 아니었다.

포기하는 것, 그것이 정답이었다. 적당히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생명을 연명해 나가며 그 속에서 삶을 개척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누가 거기에 토를 달고 거부할 수 있었을까? 굴복할 수밖에 없는 그 거대한 제국의 문명과 권능 앞에서 엄청난 장벽과 갈림길에 서 있다. 이에 대한 그들의 선택은 단호하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2절)”.

‘걸었나니’(תָּלָה, 탈라)는 사람을 처형할 때 매다는 동사이다(신 21:22-23; 수 8:29).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תָּלָה)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나무에 달린(תָּלָה)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2-23)”.

수금이 마치 처형을 당한 것처럼, 시인의 마음과 바벨론 포로로 잡혀 온 이들의 마음이다. 이방인을 위해 하나님의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결단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죄를 지어 나무에 매다는 것처럼 자신들의 악기와 노래를 더 이상 하지 않기 위하여 그것들을 처형한다는 것이다.

시온의 노래, 여호와의 노래를 더 이상 부를 수 없다는 슬픔과 비통이 시인 자신을 감싸며 고통의 구렁텅이로 빠진다 해도, 시인 자신의 신앙적 결단과 더불어 우리에게 이것을 묻고 있다. 그의 목소리가 우리 귀를 강타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4절)”.

시인은 결단코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의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 결과 어떠한 일이 발생할 것인지 모르지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정수(the Essence of Faith)를 지키겠다는 선언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라는 모세의 요구에 애굽의 바로가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출 5:9)”고 명령한 것과 같이,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결단한 그들을 향해 어떤 불이익과 고통이 주어졌는지 모르지만 현실 삶에서 분명 어려움과 고난이 더 가세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수금 타는 법도 잊어버리기를 원하노라.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거나 내가 너를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내가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라(5-6절, 현대인의 성경)”.

예루살렘을 가장 큰 기쁨으로 삼지 않고 이방인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하여 악기를 연주한다면, 나는 영원히 연주를 할 수 없는 무능자가 되리라는 일종의 저주 같은 말이다. 시인은 자신의 목숨을 신앙의 정수를 지키기 위해 내놓았다. 자신의 노래와 악기를 처형했다.

인간은 망각과 기억의 선상을 넘나들며 살아간다. 인간의 삶이 모든 것을 기억하면 어찌될까? 또한 모든 것을 망각하면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Yad Vashem(יד ושם, 야드 바셈, 이름을 기억하라)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있다. 그 입구에 ‘Forgetfulness leads to exile, while remembrance is the secret of redemption(망각은 망국의 길이며, 기억은 구원의 길이다)’이라는 문구가 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망각과 기억은 긴장(tension) 속에서 우리 인생의 순간순간을 넘나들며 빛과 그림자 같은 역할을 한다. 절망 속에서 모든 것을 망각하여 무너져 가는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의 기억은 고초와 재난의 기억을 밀어내고 우리를 소망의 자리로 이끈다(애 3:19-22).

바벨론 포로
▲독일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 속 재현해 놓은 바벨론 성 입구. ⓒ필자 제공
구약 성경은 계속 ‘기억하라’고 강조한다. “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시 105:5-6)”. 곧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그가 어떤 분이신지 기억하고 그가 말씀하신 바를 기억하라고 계속 말씀하신다(예: 신 5:15, 미 6:5, 말 4:4 등).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것도 ‘기념(고전 11:24, ἀνάμνησις remider, remembrance·기억)’하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의 메시지도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딤후 2:8)’에 항상 포인트가 있다.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었던 시인도 과거 역사에 대한 망각과 기억의 긴장에서 망각을 떨쳐 버리고, 고통과 회한의 과거일지라도 그것들을 ‘기억하여’ 신앙적 결단의 자리로 나아간다. 찬양을 연주하는 손과 찬양을 부르는 혀는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만약 그 충성심이 조금이라도 변한다면 차라리 사용할 수 없는 불구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시인을 포함한 유다 백성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국가도, 재산도, 가족도, 미래도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잃어버리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기억 속에 있는 예루살렘 여호와의 노래를 하나님의 것으로 거룩히 구별하는 순수한 믿음이었다. 하나님의 것(여호와의 노래)을 자신의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겠다는 신앙적 결단과 자존심이 있었다.

그들의 울음은 서러워서, 몸이 고달파서 우는 것에서 출발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러한 것이 아니라, 유다 예루살렘에서의 삶이 부정과 부패하였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시온’을 기억한다. ‘유다’ 혹은 ‘예루살렘’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시온’ 곧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있는 바로 그곳을 회상하며 기억한다. 우리는 무엇을 망각하고 무엇을 기억하고 있나요?

◈바벨론 강가에서… 하나님의 길(the Way)

심판받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변화시키고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바벨론이라는 제국을 통해 심판하신 것이다.

우리 주님도 죽었던 우리들을 살리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삼으시기 위하여 전적으로 자신을 포기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하나님의 일하심(working)은 심판이 최종 목적 같지만, 심판을 넘어 회복과 구원을 이루심이 최종적인 하나님의 길(the Way)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그 70년이 차기 바로 직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바벨론의 마르둑과 이쉬타르가 고레스에 의해 무너졌다. 고레스란 이름을 들었을 때, 그들은 얼마나 전율했을까? 바로 150년 전 이사야에 의해 예언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사 45:1)”.

하나님은 결단코 그들을 버리시거나 포기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하나님의 길(the Way)로 인도하시기 위한 수단으로 바벨론을 사용하셨고, 페르시아의 고레스를 사용하셨다.

여호와께서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에 감동시키시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였고, “너희 중에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칙령을 내렸다(스 1:1-3).

그 칙령에서 내용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와 ‘성전을 건축하라’였다. 바로 그 칙령이 기록된 ‘고레스 칙령(The Cyrus Cylinder)’이 영국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흔히 역사상 최초의 인권 선언문이라고 말한다. 우리 하나님의 길은 우리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역사하심(working)으로 인생들을 주장하신다.

구원자 고레스를 통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그들처럼, 죄와 죽음의 노예에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 본향인 하나님께 돌아가며 주님을 모시는 참된 성전을 건축하라는 주님의 칙령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고레스 칙령 원동
▲대영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고레스의 칙령 원통(The Cyrus Cylinder)’. ⓒ필자 제공
◈이 종말의 시대에, 당신의 이야기(Narrative)는 무엇인가?

소망 없는 바벨론 강가에 앉아 있던 그들처럼, 영혼의 겨울로 인해 슬픔과 좌절에 빠진 우리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세상은 갈수록 우리를 향해, 우리의 길을 버리고 그들의 길에 들어서라고 강요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데, 이를 비아냥거리듯 불의와 부정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의 이야기(narrative)는 무엇인가?

어찌할 바를 몰라 마냥 강가에서 통곡하는 유다 포로들처럼 슬픔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골리앗 같은 거대한 21세기의 문명에 짓눌려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이어받는 상속자라는 신분을 완전히 망각한 채 유리 방황하는 방랑자의 모습은 아닌가?

잠시 잠깐 후면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신 주님을 만날 것을 잊어버리고, 먼지를 흩날리며 슬픈 눈동자로 굵은 눈물만 뚝뚝 흘린 채 재를 뒤집어쓴 기억상실에 걸린 ‘신데렐라’ 아닌가? 우리가 진정한 신데렐라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하나님의 길이 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11)”.

거룩한 결단과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거룩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자신의 악기를 처형하고 목숨을 내놓겠다는 유다 포로들처럼, 세상 속에 있으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인생과 목숨을 내어놓는 결단과 행동이 있어야 한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의 길에서는 기쁨이 되고,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고, 주님을 찾는 우리의 절박함은 하나님의 기적을 불러오는 우리의 노래가 될 것이다. 우리를 살리신 주님의 은혜가 흘러 넘쳤던 과거의 경험과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미래의 소망 사이에서, 이 은혜의 경험과 미래의 소망의 끈을 우리의 가슴으로 강력히 잡아당기면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기억하자.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김문봉 목사
체리힐 동산장로교회(Dongsan Presbyterian Church of Cherry Hill)
부산대, 총신대 신학대학원 및 대학원,
미국 Liberty Theological Seminary, Calvin Theological Seminary, Luther Seminary 등 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