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는 질문이 적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자칫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질문들의 배경과 의미들을 찾아보는 칼럼 ‘20 Questions in Old Testament’입니다. -편집자 주

이스라엘 유다 포로 회복 바벨론
▲19세기 화가 제임스 티소(James Tissot)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린 ‘포로들의 대이동(The Flight of the Prisoners)’. ⓒ위키
시편 속 질문:

5.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시편 137:1-9)

우리가 잘 알듯, 유대인들의 후세 교육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것이 ‘질문’이다. 질문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길은 지루하지만 사고의식을 넓히고 생각하는 힘을 길러준다.

유대 랍비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축복받는 인생의 열쇠를 정답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축복받는 삶의 비결은 바른 질문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의 물음은 답의 절반이다. 좋은 질문은 답이 나오더라도 사라지는 법이 없다. 구약에 많은 질문들이 나온다. 오늘 본문인 시편 137편 4절도 질문 형식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질문을 넘어 질문자의 의도를 강조하고 인식시키기 위한 소위 ‘수사적 질문(Rhetorical Question)’이라 할 수 있다.

‘결단코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아랫배에서 나오는 묵직한 음성으로 온 힘 다해 외치고 있는 것이다. 왜 시인은 이렇게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절규해야 했을까?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피 토하는 심정으로 외치게 만들었을까?

◈유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양분된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은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다. 하지만 어떤 열방의 신도 앗수르의 정복을 막은 적이 있었느냐고 큰소리치던(사 36:18-20) 그들의 교만은 바벨론에 의해 꺾였다.

B.C. 609년, 애굽 왕 느고 2세는 앗수르를 돕기 위해 갈그미스로 향한다. 이때 남유다 요시야 왕이 애굽과 므깃도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고, 본인도 전사한다(왕하 23:29; 대하 35:20-24). 결국 전쟁은 바벨론의 승리였다. 느고 2세는 요시야에 이어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를 포로로 잡아갔고, 여호아하스의 형인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시켜 왕으로 앉혔다. 이때부터 유다 왕국의 치욕스러운 역사가 시작된다.

B.C. 605년, 느고는 다시 갈그미스로 향했지만 승자는 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으로 돌아갈 때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가 끌려간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에 의해 세 차례에 거쳐 포로로 끌려가고 세 차례에 거쳐 귀환하는데, 그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B.C. 601년 바벨론과 애굽의 전쟁에서 여호야김은 바벨론을 배신하고 애굽과 손을 잡는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속국이던 모압·암몬·아람 등을 이용해 유다를 치고 이 과정에서 여호야김이 죽는다. 이후 왕위에 오른 여호야긴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데, 이것이 2차 포로였고 이때 에스겔 선지자도 있었다.

여호야긴에 이어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고 바벨론에 반기를 든다. B.C. 586년 바벨론은 유다로 진격해 18개월 동안 예루살렘 성을 둘러쌌는데, 기근이 심해 양식이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왕하 25:1-3).

더는 버틸 힘이 없었던 유다는 제대로 된 저항 한번 못한 채 철저하게 짓밟힌다. 느부갓네살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은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 수많은 집들을 불살랐으며, 예루살렘 주위 성벽을 헐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왕하 25:8-11).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히고 사슬에 결박당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된다(왕하 25:7). 시드기야는 죽는 날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은 그들이 멸망한 가장 주 요인을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여(단 9:6, 10, 11, 14)’, ‘범죄하였다’고 고백한다(단 9:7, 8, 11, 15). 바벨론의 세 차례에 걸친 예루살렘 침공은 그들을 철저하게 황폐하게 했고, 모든 소망이 끊어진 듯한 고통과 슬픔, 치욕과 눈물, 절망과 환란 그 자체였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애 3:18-19)”라고 읊조린다. 그는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애 4:8)”고 탄식한다.

바벨론 포로
▲대영박물관에 보관된 바벨론 포로 부조. ⓒ위키
◈바벨론 포로

역사 속 제국들이 정복한 땅을 통치하는 방법에는 대략 세 가지가 있었다. 가장 많이 행하는 것이 ‘이주 정책’이다. 포로로 잡아가는 것이다. 북이스라엘을 무너뜨린 앗수르도, 남유다를 정복한 바벨론도 그렇게 했다. 비단 그때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항상 있어왔던 일이다. 구소련과 일본 제국주의도 그랬다.

다른 중요한 방식은 ‘혼인 정책’이다. 앗수르에 점령당한 ‘사마리아인’들이 그 배경이고, 몽골 제국, 대영 제국, 심지어 다윗도 그렇게 했다. 식민지 나라를 자신의 제국에 동화시키고 흡수하기 위한 중요한 정책 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문화정책’인데, ‘창씨개명’이 대표적이다. 특히 제국주의 일본은 1940년부터 이를 강력하게 시행했는데, 당시 80%까지 했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였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예도 들 수 있겠다. 문화정책의 핵심은 식민지 문화를 말살하고 그들의 모든 의식과 삶을 완전히 통제한다는 제국주의 핵심 정책이다. 결국 바벨론은 유다의 포로들에게 이 세 가지 정책을 다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바벨론에 잡혀온 유다 백성들은 전혀 희망이 없어 보였다. 결단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벨론 신 마르둑 앞에 무릎을 꿇었단 말인가? 바벨론 유배 경험은 그들에게 끔찍한 고통과 치욕일 뿐 아니라 삶의 모든 중심과 방향을 상실하는, 곧 삶의 준거틀(Frame of reference)이 처절하게 무너지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전에 이미 예레미야의 경고가 있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 5:1)”. 그런데 이 한 사람이 없었다고?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30-31)”. 바벨론 침공 직전 예루살렘 상황이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은 마치 애굽 노예 생활을 연상케 한다. 애굽의 상황이 처절했던 것은 노예 생활도 있었지만, 극도의 가혹함 때문이었다. 애굽 관리는 ‘엄했고(출 1:13,14) 괴롭게 하였고(출 1:14) 어렵고 가혹했다(잔인하다, 출 1:14; 6:9). 이스라엘은 ‘비참함과 고통(출 3:7)과 마음의 상함(출 6:9)’ 가운데 괴로워했다. 인간 존재의 목적과 기쁨의 주요 원천이어야 할 출산(창 1:27-31; 2:15)조차 가혹한 압제에 의해 비참하게 변질됐다.

하지만 애굽의 노예생활과 바벨론 포로 생활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바벨론 포로는 자신의 죄악들, 곧 부패와 타락,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우상 등이 그 바탕에 있었다. 그들은 포로였지만 다니엘·느헤미야 등의 인물들을 보면 애굽 포로 때와는 사뭇 다른 면도 있었다. 그럼에도 바벨론 강가에서 파괴된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무너진 성전을 떠올리면, 견딜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스며들어 애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래의 영국 런던 박물관 부조에서 보듯, 바벨론의 노예로 강제 노역을 하던 것이 시편 137편 당시 상황이었다.

루벤스 한복 입은 남자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작품 ‘한복 입은 남자(Man in Korean Costume, 1617년경)’. 폴 게티 박물관 소장. ⓒ폴 게티 박물관
◈슬픔과 한(恨)이 응어리진 민족

반만 년 역사 속에서, 한반도는 900회 이상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 1592년 이후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간 포로가 10만 명 이상이었고, 1636년 12월에 시작된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잡혀간 조선 사람들이 50만 명이라는 통계도 있다.

이들은 모두 일본과 청나라에 있어 훌륭한 노동력이자,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이들은 일본과 청나라 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 연고 없이 쓸쓸히 죽어가던 우리 조상들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들 중 일부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렸고, 그 중 일부는 지중해까지 팔려갔다.

그들 중 한 명이 당대 바로크 미술 거장이었던 벨기에 화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눈에 띄어, 그의 그림 모델이 됐다. 이 그림이 1983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 나오면서 널리 알려졌다. 바로 <한복 입은 남자>란 작품으로,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 꼬레아’로 알려졌다. 남루하고 왜소한 그의 모습에 애틋함이 간다.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노라면, 세월의 한파와 역경이 느껴진다. 왠지 모를 불안과 서러움이 깃들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필자는 6.25 동란으로 남쪽으로 피난 오셨던 부모님을 바라보면서 자랐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고, 오직 두 분이 서로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안 해 보신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고생을 하셨다.

한번은 중학교 때 학교 옆 시장통에서 우연히 어머니를 목격했다. 빨간색 통(다라이)을 시장에서 머리에 이고 다니시면서, 장사할 자리가 없으니 메뚜기마냥 여기저기 옮기면서 물건을 파시는 장면을 봤다. 그런데 한 아저씨가 ‘이북 따라지’ 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다시 자리를 옮기시며 혹 자녀들에게 해가 될까 아무 대항도 하지 않으셨다. 고향을 잃은 피난민의 한(恨)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차츰 알게 되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나 입 밖으로 결코 말할 수 없는 아픔이 그 마음을 늘 헤집었고, 삶을 일구기 위하여 무던히 애를 쓰지만 두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각각 1923년과 1927년생이셨던 부모님은 일제 시대 나라 잃은 슬픔을 지나 북한 공산당의 잔인함을 몸소 체험하셨고, 전쟁으로 인한 살육의 비참함과 마음을 비수로 도려내는 고통과 슬픔이 넘치는 그 길을 헤쳐 나오셨다. 어찌 그 속에 한이 서리지 않았으리오! 슬픔과 한이 응어리진 한민족(韓民族)의 역사의 라인에 서 있었다.

바벨론으로 잡혀 온 유다 백성들 형편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결단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예루살렘 성 그리고 성전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벨론 신 마르둑 앞에 무릎을 꿇은 것 같은 바벨론 유배의 삶은 그들에게 끔찍한 고통과 치욕의 역사일 뿐 아니라, 삶의 모든 중심과 방향을 상실하고 그들의 정체성이 완전히 무너지는 시간들이었다.

시편 137편은 바로 그 포로생활의 고통과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그들의 가슴에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한(恨)이 자리잡고 있었으리라.

Nabucco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오페라 ‘Nabucco’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공연 모습. ⓒ필자 제공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The Metropolitan Opera House) 1월 18일 공연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미국 동부 큰 폭설과 한파로 도저히 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가 4막으로 작곡하고 1842년 초연된 ‘Nabucco(느부갓세살의 히브리식 표현)’라는 오페라였다. 관람하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 많았다. 시편 137편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오페라로, 역사상 가장 많은 히트를 친 곡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베르디가 이 곡을 발표하던 당대의 이탈리아 상황도 암울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지배 하에 압제당한 상황을 히브리 노예 모습에 비유한 것이었다.

이 곡은 이탈리아의 ‘민족의 노래’가 되어 통일의 큰 밑거름이 되었다. 링크된 아래에서 전 곡을 감상할 수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곡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다.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이 곡을 아느냐고 현지 사람들에게 여러 번 질문했는데, 아쉽게도 아는 이가 별로 없었다.

◈바벨론의 강가에서… 현실의 통곡

세상을 손에 넣은 바벨론은 잡아온 포로들을 노리개 삼아 여흥을 즐겼고, 유대 성전음악가들에게 파티를 위한 노래를 시켰다. 유다 포로들에게 외쳤다. “자, 악기를 동원해라. 너희들의 신을 위하여 부르던 그 노래를 우리의 유흥을 위하여 노래하라. 너희들의 악기를 연주하여 우리를 기쁘게 하라. 우리를 만족케 하라!”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눈에 보이는 것도, 아무런 소망도 없어 보이는 그들은 그냥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여러 강변은 유브라데스 강과 그발 강(겔 1:3), 을래 강변(단 8:2)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울었다’(בָּכָה, 바카)는 단순히 눈물을 흘렸다는 정도가 아니다. 한나가 통곡하며(삼상 1:10) 기도했다는 말씀과 같이, 비탄에 빠져 땅에 앉아 대성통곡했음을 알 수 있다.

바벨론의 엄청난 문명 앞에 직면한 그들은 놀라운 건축과 운하, 수로 공사에 노예로 동원되어 죽을 고생을 하니 ‘시온을 기억하며(1절)’ 애통하며 울고 있는 것이다. 회상과 후회, 회상과 고통의 연속선상에서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강가에서 통곡하는 그들은 누구였던가? 이 시인(히브리 노예)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수금을 연주하며(2절) 하나님을 찬양하던(3절) 레위인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한 시인은 그들의 심정을 잘 대변한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바벨론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해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라는 것은 그들에게는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3절)”.

‘우리의 노래(דִּבְרֵי־שִׁ֭יר, 다바르 쉬르, 우리의 노랫말)’를 ‘노래하라(שִׁ֭יר, 쉬르)’는 자신의 신들에게 패배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조롱 섞인 말이다.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시온의 노래’ 곧 ‘여호와의 노래(4절)’는 필요 없으니, 자기들을 위하여 노래하라는 것이다.

이 ‘여호와의 노래’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대상 16:42)와 하나님의 노래(대상 29:27)을 말하며, 더 거슬러 가면 “여호와께 노래하니… 여호와의 나의 힘이요… 여호와는 용사시니”의 모세의 노래였다(출 15:1-18).

이들에게는 이 노래들이 하나님과 민족을 위한 애국가(?)와 같은 것들이었다. 성전 예배용 거룩한 노래를 이방 땅에서 오락을 위해 부를 수 있겠는가? 그것은 거룩한 것을 더럽히고 시온을 반역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계속>

김문봉 목사
체리힐 동산장로교회(Dongsan Presbyterian Church of Cherry Hill)
부산대, 총신대 신학대학원 및 대학원,
미국 Liberty Theological Seminary, Calvin Theological Seminary, Luther Seminary 등 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