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장 1-22절: 선교와 종교다원주의

카라바조 베드로의 부인
▲화가 카라바조의 ‘베드로의 부인(1607)’. 이전까지 화가들은 닭이 울자 베드로가 슬피 울며 후회하는 모습을 그렸으나, 카라바조는 닭이 곧 울기 직전 상황, 즉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모습을 그렸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이를 소장하고 있다. 예수님을 부인하던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후 가장 열정적인 전도자로 변화했다. ⓒ크투 DB
종교다원주의의 배경과 내용, 그리고 쟁점들은 무엇인가? 다원주의의 장점과 문제점은 무엇인가? 다원주의 상황에서 어떤 선교적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인가?

1.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예수의 추종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수천 명의 군중들이 몰려드는 역사는 산헤드린에 큰 위협으로 느껴졌다. 산헤드린은 이 모습을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물론 이 때까지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라기보다 유대교 내에 일어난 다양한 운동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산헤드린은 강력해진 그 운동이 자신들의 위치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에, 권력과 법을 앞세워 그 운동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산헤드린은 사도들을 세워 놓고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행 4:7)’ 그런 일을 행하는지 묻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사도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면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고 천명하였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유일 구주성을 입증하는 가장 현저한 성구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구원’에 해당하는 ‘헤소테리아(hesoteria)’는 관사와 더불어 보다 높은 의미에서 메시아적 구원을 가리킨다.

이 구원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먼저 ‘치유’, 즉 육체적 구원이란 의미를 갖는다. 이 경우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던 역사를 가리킨다(행 3:6-8).

두 번째, 영적 구원의 의미이다. 즉 죄로 말미암아 파생된 정신적·영적 질병의 치유와, 장차 임할 심판에서 건짐을 받는 모든 것이 예수께로부터만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따라서 산헤드린이 그 이름을 계속 거절한다면 구원은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배자들이 취해야 할 의무와 지혜의 방향은 명백해졌다. 만일 그들이 그 사실을 거절하고 현재의 태도를 고집한다면, 그들 자신과 함께 그 민족은 멸망에 빠져버릴 것이다. 베드로는 바로 이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이 사실은 베드로가 말하기 이전과 그 당시뿐 아니라 그 이후 오늘날까지도 성경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변치 않는 진리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 구주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사도행전 4장 12절의 고백은 ‘사랑의 언어’ 혹은 ‘상황적 고백’이며, 우주적 그리스도는 모든 종교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종교다원주의 창시자 중 하나인 폴 니터는 행 4장 12절을 해석하면서, 그 구절은 종교를 비교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라 신앙과 치유를 위한 구절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전후 문맥을 따라서 읽고 해석해 보면, 그 구절은 다른 내용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능력 안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구원했다는 것을 말하려는데 있다. 즉 베드로나 요한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와 이름 안에서 생겨난 능력이 앉은뱅이를 치유했다는 것이다.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말은 구원이 예수의 이름에 의해 매개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지, 그 이름의 배타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이름은 없다”는 말은 철학·과학·교의학의 언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과 증거의 언어에 속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성서의 언어는 과학자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의 언어라는 것이다. 마치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야, 내게 유일한 여인이야”라는 사랑의 표현과 같은 언어적 표현이라고 니터는 보았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니터는 조심스럽게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 공동체의 사랑 고백을 주관화한다.

2. 종교다원주의의 주된 주장

종교다원주의의 견해에 의하면 세상에는 하나의 절대적인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교가 존재한다. 종교다원주의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인 존 힉은 “모든 종교는 하나의 진리이신 신(God)이 각기 다른 문화적인 배경을 따라 다르게 표현된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즉 모든 종교적 신념과 실천의 중심에는 ‘하나의 신적 실재(one divine reality)’가 있으며, 역사적으로 나타난 모든 종교들은 이 실재에 대해 역사적·문화적으로 제약된 인간의 반응이라고 밝혔다.

아무리 종교가 많아도 결국 하나의 신이 여러 개로 재현(representaion)된 것뿐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전통적 예수 중심적 모델로부터 신 중심적 모델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류는 처음에 각 사람의 내적 종교성(Innate Righteousness)으로 신앙생활을 했고, 주전 900년 또는 800년 경부터 세계 주요 문명 발상지인 그리스·근동·인도 및 중국에 위대한 종교적 각성이 일어나 고등 종교가 형성됐다. 이때는 인류 문화와 종교의 기본 축이 형성된 시기로, 이 즈음 히브리 예언자들이 살았고 페르시아에는 조로아스터, 중국에는 공자를 위시한 사상가들, 인도에는 부처와 우파니샤드의 기자들이 살았고, 그리스에는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및 플라톤 등이 존재했다.

히브리 예언자들의 전통을 받아 예수와 기독교가 출현했고 후에 모하메드과 이슬람교 형성을 보게 됐는데, 수천 년 전에는 대륙 간 통신수단이나 문명의 발달 속도가 느렸기에 사람들은 각기 다른 자신들의 문화권 속에 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들의 횡적 교류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질 수 없었고, 수직적으로 각각 분리된 계시가 주어졌다. 이러한 계시는 영적 감수성이 뛰어났던 사람들에게 주어졌는데, 그 계시는 자연스럽게 시간·공간·역사·문화·언어·기후 등에 의한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계시자는 동일했어도, 계시의 문화적 형태는 다를 수밖에 없게 됐다.

결국 여러 명의 종교 창시자들이 있지만, 그 창시자들이 지시하는 신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종교가 여럿 있다는 것은, 하나의 정상을 향한 여러 개의 길이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예수 한 사람에게 역사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예수 외에도 여러 종교가 주장하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신의 배타적 계시가 아니며, 예수 밖에서도 얼마든지 신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도 우주적이며 초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항상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순전히 역사적 현상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 절대성을 구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들 간의 차이는 진리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다른 인식의 문제라고 여긴다. 즉 종교적 믿음에서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그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믿음은 개인적인 문제이고, 각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가질 권리가 있음을 말한다.

3. 종교다원주의, 어떤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가?

다원주의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고, 실제로 그것이 실천된다면 종교 간 갈등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심각한 문제점들을 지닌다.

1) 기본적으로 종교다원주의는 성경이 아니라 이성에 기초를 두고 있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성경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가장 핵심 가르침은 무엇인가?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2-3)”.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하나님을 보여주셨고, 그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복음의 각주(footnote)가 아니라, 복음 그 자체이다. 이 핵심 사항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성경 전체를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경을 다시 쓰거나 제거하지 않는 한 여호와 이외의 다른 하나님을 말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절대성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종교다원주의는 역사적 상대주의에 그 뿌리를 두면서 문화상대주의나 현대 과학철학에서 발달된 인식론적 상대주의 등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형성되었다. 즉 하나님 말씀보다 철학, 즉 인간의 이성에 더 신뢰를 두고 형성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이성을 말씀보다 더 신뢰하는 다원주의는 성경 가르침을 신화로 해석함으로써, 성경이 신학과 행위의 규범이 됨을 거부한다. 결국 다원주의는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문자주의라며 무시하면서,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기초를 제거하고 기독교의 특징을 백지화시킨다.

2) 종교다원주의는 지나친 상황화의 산물이다

다원주의는 상황을 진리보다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관심보다, 상황에 대한 관심이 더 많다. 모든 사람의 구원이나 종교 간 갈등 해소 등을 희망하면서, 이 같은 희망의 성취를 위하여 진리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는 필요에 의하여 진리를 조작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며, 변하는 상황을 불변하는 말씀보다 우위에 두는 과도한 상황화를 시도한 것이다.

갈등과 평화적 공존 등 인류가 맞이한 여러 문제 해결을 위해 다원주의적 견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해결의 길이 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진리는 대화를 통해 합의해 나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류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범종교 간 공동 대처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윤리 차원에서 다룰 문제이다.

신앙이 다른 사람들끼리도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윤리적 차원에서 함께 협력을 논의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쉽게 이루기 위해 진리를 무시하고 모두가 같은 구원을 지향하려는 것은 바른 접근이 아니다.

타종교들은 독점과 배타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데, 기독교 신학자들만 기독교의 절대성을 스스로 포기하면서 다원주의를 외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일 수 있다.

3) 종교다원주의는 이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종교철학적 가설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다원주의를 채택할 경우 종교 간 갈등이 줄어들 것이고, 이는 곧 인류의 행복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모든 종교가 동등한 진리라면, 그것은 동시에 모든 종교가 허위라는 말도 될 수 있다. 신앙이란 인간에 있어 절대적 근본을 형성하는 것이며 신앙 대상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기초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원주의자들은 각 종교의 궁극적 실재를 신화론적 표상으로 간주해서 종교적 불가지론(religious agnosticism)에 빠지고 있다.

즉 각 종교 신자들은 궁극적 실재를 사실적 실재로 보는데, 다원주의자들은 그것을 신화 같은 것으로 여김으로써 신앙을 허구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된다면, 인류는 절대성을 상실하고 희망의 근거를 상실하면서 커다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결국 여러 종교들이 다원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일 가능성 자체는 희박하다. 기독교 학자 가운데서는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자가 많지만, 힌두교·불교·이슬람 학자 가운데 다원주의적 견해를 주장하는 자가 거의 없다.

설사 그들이 다원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은 그들이 바라는 인류의 번영과 평화가 아니라 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극도의 타락으로 인한 인류의 불행이 될 공산이 크다. 종교다원주의는 종교적 경험과는 거리가 먼 하나의 종교철학적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4. 다원주의 상황에서 바람직한 선교 자세는 무엇일까?

1) 불필요하게 독선적인 모습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지나치게 독선적 자세는 오히려 반감을 주고, 전도의 문을 막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 예를 들어 공공연하게 불교도나 기타 다른 종교인들을 사탄이라고 규정한다든지, 단군상을 파괴한다든지 하는 자세는 기독교를 낡고 시대착오적인 종교로 보게 만든다. 나아가 타종교인들이나 비종교인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혐오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이러한 것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기독교를 폐쇄적이고 아집이 가득한 문화적 낙오자로 생각하게 되고, 결국 사회 내에서 기독교의 목소리가 설 자리를 잃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한 걸음 나아가 우리는 적극적으로 포용적이고 화해적이며 사랑이 풍성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비난받는 것은 교리적 배타성 때문보다는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서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태도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확신을 가지면서도 독선적이 아닌 겸허한 태도로서 구원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반틸이 지적한 대로, 방법은 부드럽고 사상은 강하게 할 필요가 있다.

2) 철저한 겸손과 헌신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논쟁과 변론으로 기독교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것은 한계가 있다. 또 강압이나 폭력을 써서 복음을 전하려는 것도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온다. 이렇게 할 경우 다원주의자들이 우려하는 종교 간 갈등이나 폭력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복음의 능력을 삶 속에서 보여줌으로써 전도해야 한다.

우리 삶 자체가 복음이 될 때 타종교인들이 감동을 받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복음’은 ‘말’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달되는 것이다(고전 2:1-5). 그리고 여기에는 생명을 얻게 하려는 ‘사랑의 헌신’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요 “변론과 논쟁” 이상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게 된다.

목숨을 내놓고 이슬람교도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던 성 프란시스코는 말했다. “그들이 세상으로 나갈 때 그들은 말로써 다투거나 싸워서는 안 된다. 또 남을 판단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누구에게나 정중하게 말함으로써 온유하고 평화로우며 점잖고 겸손함을 보이도록 하라.” 지극한 온유와 겸손 속에 복음을 전하는 참된 본을 보여준 것이다.

3) 분명한 복음을 소유해야 한다

타종교에 최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신앙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방향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절대성에 대한 확신은 각 종교의 특성이다. 이 같은 확신에서 종교적 확신이 오고, 종교적 확신이 있을 때 종교는 생명을 가지며, 종교적 생명은 사회적 활력으로, 그리고 선교와 봉사로 이어진다.

종교가 선교, 포교, 혹은 전도를 중단할 때, 그 종교는 자기 확신과 생명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브루너(Emil Brunner)는 “불이 타므로 존재하는 것과 같이, 교회는 선교하므로 존재한다. 선교가 없는 곳에 교회는 없다. 따라서 교회도 선교도 없는 곳에는 신앙도 없다”고 말했다.

복음은 본질상 보편적인 역사적 선교를 수반하는 메시아 운동을 만든다. 이러한 운동이 약화될 때 교회는 약화되고, 이런 교회는 결코 인류 구원와 평화를 위해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게 된다. 초대교회가 그러했듯, 다원화 시대일수록 오히려 복음은 더 선명해야 한다.

안승오 사도행전에서 배우는 선교 주제 28가지
안승오 교수(영남신대)

성결대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M.Div)에서 수학한 후,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으로 신학 석사(Th.M) 학위와 철학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총회 파송으로 필리핀에서 선교 사역을 했으며, 풀러신학대학원 객원교수, Journal of Asian Mission 편집위원, 한국로잔 연구교수회장,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7 Key Principles of Dynamic Church Growth』, 『Rethinking the Theology of WCC』, 『선교사가 그린 선교사 바울의 생애』,『능력 있는 예배를 위한 7가지 질문』, 『건강한 교회 성장을 위한 핵심 원리 7가지』, 『사도행전에서 배우는 선교 주제 28가지』, 『현대 선교학 개론』(공저), 『한 권으로 읽는 세계 선교 역사 100장면』, 『성장하는 이슬람 약화되는 기독교』,『현대 선교신학』, 『현대 선교의 핵심 주제 8가지』, 『이슬람의 어제와 오늘』, 『현대 선교의 프레임』, 『제4 선교신학』,『성경이 말씀하는 선교』, 『현대 선교신학(개정판)』, 『현대 선교의 목표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