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
▲함께 떡을 떼는 초대교회 가정 예배 모습. ⓒ크투 DB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

지금 같은 형제와 민족끼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치르는 치열한 혈전으로 나라 전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오롯이 권력과 패권싸움으로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이 민주주의만 외치면서 백성들을 위하는 척 하는 거짓 선동과 꼼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사명이 무엇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한 채 오롯이 국회의원 배지만 달면 그만이라는 고약한 심보를 가진 이들은 국회의원으로서의 자질은 물론, 본질(本質)을 제대로 파악이나 하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인들의 자세는 어떠한가요. 나라가 흥망의 기로에 서 있음에도 지도자들의 침묵에는 예수님 사랑의 정신과 사상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나 있을까요. 알면서 묵인하는 건지 아니면 그들과 같은 사상으로 동조하고 있는 건지…. 36년간 일제 치하에서 엄청난 고통 속에 신음하는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싸웠던 믿음의 선배들의 고귀한 정신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신명기 6장 5절에 나오는 ‘마음’이란, 사랑과 정서가 깃드는 기관을 말합니다. 세 번 반복되는 ‘다하고’는 하나님을 따르는 생활의 특징을 강조합니다. 성품을 뜻하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영혼’으로 번역될 수 있고, ‘생명’ 혹은 ‘인격, 죽음’을 뜻할 때도 쓰입니다. ‘힘’은 체력이나 정신력처럼 인간이 소유한 모든 힘을 말합니다. 구태여 이 세 가지를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 가지 모두 한 인간의 속성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는 6-7절 말씀 중 “마음에 새기고”란, 의무는 자신이 지켜 행할 본분이므로 마음의 문제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기쁜 마음으로 자기의 짐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가르치며”란, 마음에 가득찬 것이 입으로 나오기 때문에 강하게 명령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강론할 것이며”는 자녀교육 의무를 뜻하므로, 가장은 가족의 신앙교육을 책임지고 스스로 율법에 정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의 신앙 성장을 오직 교역자에게만 일임하는 것은 부모의 안일함과 무능함에서 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본문은 십계명 전반부는 하나님에 대한 것, 후반부는 인간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십계명 전반부의 요약으로, 예수님께서 신명기 6장 5절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는 유대교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가르침의 한 부분입니다. 39절은 십계명 후반부를 요약한 것으로,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사랑은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40절 말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구약 성경의 핵심이자 본질임을 나타내십니다.

‘본질(本質)’이란 사물을 그 자체이도록 하는 고유한 성질이라는 뜻으로, 철학적으로는 한 사물이나 과정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보편적이고 변함없는 요소들의 총체로, ‘존재(存在)’가 비슷한 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이 사물의 존재를 규정하는 원인이라며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물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것”이라 했고, 사물의 존재 그 자체라는 뜻에서 사물의 ‘실체’라고 했습니다. 또 본질은 사물의 정의에 포착되는 것으로 개개(箇箇) 사물의 공통성인데, 이 공통성은 개개 사물 속에 있어 그 사물의 존재를 구성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개개’란 각각 하나하나를 뜻합니다.

근대 과학에서 사물의 존재는 정의에 따라 실체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연히 소유하고 있는 작용에 의해 기능을 갖는다고 파악되고 나서부터 본질의 개념이 불분명해졌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사물에게 간혹 있기는 하지만 항상 있지 않고 있어도 없어도 좋은 것은 사물 본래의 성립이라는 점에서, 본질이란 사물의 본성이라고 합니다. 즉 사물의 존재를 규정하는 원인이 됩니다.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면 분명한 기준을 세우고 그것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그는 말하며, 우리 삶도 마찬가지로 목표가 무엇인지 확신하고, 그 목표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 보라고 합니다. 핵심이 빠진 채 부차적인 것에 집중하면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란 매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좋아하는 방법 중 하나를 중심을 기준삼아 세웁니다. 그걸 목표로 설정합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에게 정한 내용을 알립니다. 어떤 결과를 내고 싶다면, 그에 걸맞는 행동 목표를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행일치(言行一致·말과 행동이 같은)를 이루고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하며 나아가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결국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본질적인 것을 따라 열심히 지속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것입니다.

특히 잘 잊고 사는 우리 신앙인들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그 마음을 품고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들이 갖춰야 할 ‘본질’입니다. 그리고 우리 일상에서 흔히 말하는 ‘기본(基本)’입니다. 기본이란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가장 먼저 또는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믿음과 신앙의 기본을 우선 갖추어야 합니다,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있어 기본적인 것에 충실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지식이나 학문, 전공 분야는 우선 성공하는 것 같으나 결국 실패의 연속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앙의 기본이나 사회생활의 기본에 충실하다 보면, 본질의 사명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며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13)”. 포로 된 유다 공동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온 마음’ 곧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때에야 가능해진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는 합심한 마음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나를 구하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약속하신 말씀이 곧 신앙인의 본질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착각 속에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인 목사와 장로들이 신앙의 본질을 왜곡해 교회 안팎에서 존경받지 못한 채 비신앙인들까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수준까지 이르렀으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를 본받자고 말만 할 뿐, 실제 행동은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와 현 시대는 엄연히 다릅니다. 그 시대와 비교하면 지금은 행복한 신앙으로 충만해야 하는데, 더 가지려 하는 탐심의 작동으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은,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시대와 지역과 종족과 인간의 계급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몸임을 믿는다(엡 1:23, 4:16). 그리스도인들은 한곳에 모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송과 기도를 드리며, 세우심을 받은 자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에 접붙임을 받기 위하여 세례를 받고, 주님의 구속적 사역인 십자가의 사건을 기억하고, 영적으로 그 사건에 동참하기 위하여 성만찬식에 참여한다. 이러한 예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성도의 교제를 증진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말씀으로써 훈련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권징을 시행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교회에 위탁하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여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노력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과거 신앙고백서 제7장 1-2조입니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지 않고 자신만의 복음에 흠뻑 젖어 본질을 잊고 산다면, 신앙생활에 아무 감동이 없을 것입니다.

신앙고백서 제8장 1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 안에서 그가 소속한 민족을 사랑하고 국가에 복종할 의무가 있음을 믿는다(벧전 2:13-14). 지상의 권세 자체가 하나님의 권세를 대행하는 것은 아니나, 하나님은 지상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 권세를 지상의 특정인에게 주셨다(롬 13:1).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도 지상국가의 법과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

5조는 어떨까요? “국가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교회는 그 전쟁이 하나님의 공의에 모순되는 것인가를 예의 검토할 것이며, 국가가 불의의 세력에 의해서 침략을 당했을 때,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수호하기 위하여 일어나 불의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

이렇게 명시되어 있음에도, 오히려 교회 안에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불순한 사람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에게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며 본질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차라리 교회를 떠나 그들의 놀음에 함께 장단을 맞추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지금 이 나라 정치인들은 본질을 망각한 채 착각 속에서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할 일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오롯이 눈속임과 거짓 탈을 쓴 뱀처럼 잇속만 챙기다, 때만 되면 나라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합니다.

공직자와 교사, 사법부 인사와 노동자들 역시 저마다 사명의 본질을 충실히 이행해야 할텐데, 허구헌날 머리에 띠를 두르고 손에는 피켓을 든 채 걸핏하면 시위나 데모를 하는 모양새는 아직도 후진국을 면치 못하는 수준으로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의 처참한 수준입니다.

이제 본질을 망각하고 살았던 시선을 다시 주님께로 돌려놓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주는 것” 이라고 말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말처럼, 어둠에 갇힌 이들에게 빛을 열어주는 참 진리를 삶으로 밝혀주기를 소망합니다.

갖은 고통과 난관에도 좌절하지 않는 용기로 희망을 일으키고, 불행에 지배당하지 않는 자유의 비법을 함께 찾읍시다. 모든 신앙인들은 예수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배우려 노력합시다. 삶에서 묻어난 복음이 작용되는 순간이 가장 신바람 나기에, 예수님 사랑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실천해 나가는 이 시대의 십자가 군병들이 됩시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