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장로회신학교 1회 졸업 후
예장 통합 파주 금촌교회 전도사로
6.25 때 부친과 아내 학살에도 용서

파주 금촌교회
▲파주 금촌교회 전경.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창립, 대학생 선교를 기반으로 민족복음화 및 세계복음화 운동을 주도했던 故 김준곤 목사(1925. 3. 28-2009. 9. 29)의 첫 사역지가 파주 금촌교회(예장 통합)로 밝혀졌다.

그동안은 김준곤 목사의 첫 사역지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함께 김준곤 목사는 호적상 1925년생이나, 본래 출생 연도는 1924년으로 올해가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라고 한다.

이에 대해 김철영 목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는 “김준곤 목사님이 1948년 9월 장로회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시고 첫 사역을 한 교회는 경기 파주시 율목길 85(금촌동 334-117)에 소재한 예장 통합 금촌교회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지난 1월 5일 금촌교회를 방문하고 왔다”고 밝혔다.

김철영 목사에 따르면, 김준곤 목사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조선신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으나, 송창근·김재준 교수가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것에 반대해 정규오·신복윤·박창환·조동진·엄두섭 등 51인과 함께 부산 고려신학교에 편입했다가 남산 장로회신학교가 복구하자 박형룡 박사(조직신학)를 모시고 올라와 1948년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 김준곤 목사는 1995년 8월 29일부터 9월 1일까지 경기 가평 광성수양관에서 ‘처음 사랑으로, 처음 부르심으로’라는 주제로 열린 CCC 전국간사수련회 저녁집회에서 ‘CCC 역사와 뿌리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간증하시면서, 신학교 졸업 후 첫 사역 교회와 관련한 스토리를 언급했다.

당시 김준곤 목사는 “장로회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경기 파주 금촌에 있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미국 유학을 위해 서울에 있는 영어학원을 다녔다”며 “그때 인정진 사모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전방인 파주 지역에서 사역하던 김준곤 목사는 1950년 6월 25일, 마침 일선 시찰을 나왔던 신안군 장산면 대리 출생 장홍염 국회의원(당시 한국민주당)이 국회팀과 시찰을 하고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인정진 사모, 어린 딸(은희, 1946년 10월 29일 출생)과 함께 고향인 전남 신안군 지도읍 봉리마을로 내려갔다고 회고했다.

김준곤 목사는 “6월 25일 주일 새벽기도 설교를 하려고 4시쯤 일어났는데, 대포 소리가 나서 연습인가 하고 있는데 얼마 안 있어 5시쯤 되니 피난민들이 쏟아져 내려왔다”며 “북한군이 남침해 피난민들이 홍수처럼 밀려오고, 대포 소리도 가까워졌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한 바 있다.

김 목사는 “당시 금촌교회에는 정미소를 하는 대갑부 권사 부인회(여전도회) 회장이었고, 제게 줄 사례비는 성가대 대장을 하던 집사가 갖고 있었는데 피난을 가버렸다고 하더라”며 “어디서 돈 한 푼 얻을 데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김준곤 목사는 금촌교회에서 나와 10리 정도 내려오다 소아마비 아들이 있는 그 대갑부 권사 집에 가서 길게 기도했다고 한다. 기도 내용은 ‘전쟁이 끝나고 그 아이가 커서 몸이 기적으로 나아져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후 장홍염 의원과 국회팀의 버스를 얻어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게 됐다.

훗날 김준곤 목사가 어느 지역에서 집회를 하는데, 건장하고 잘 생긴 한 청년이 찾아와 “목사님, 금촌에서 정미소 했던 아무개 권사를 아세요? 제가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나았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파주 금촌교회
▲파주 금촌교회 정면.
김철영 목사는 “김준곤 목사님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첫 사역지를 찾는 일이 마지막 퍼즐처럼 남아 있었다. 그래서 파주 금촌 지역에서 70년 넘은 합동과 통합 교회들을 대상으로 찾아보기 시작했다”며 “김 목사님은 1958년 9월 장로교 총회가 예장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된 후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예장 합동 소속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두 교단 교회 중 1948년 이전 설립된 교회를 찾기 시작했는데, 금촌교회에서 전도사 신분으로 시무했음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파주 금촌교회는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한 장로교 첫 선교사 언더우드가 1907년 3월 15일 개척하고 이원긍·신태영 씨를 중심으로 금촌3리(새마을)에서 초가 4간을 예배처로 삼은 역사적인 교회이기도 하다.

김준곤 목사 부부는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부인 인정진 사모가 주일학교를 했다는 이유로 좌익에 의해 1950년 10월 3일 학살당했고, 김 목사 부친도 학살당했다.

김철영 목사는 “김준곤 목사님은 그러나 아내와 부친을 죽인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고, 처벌을 받지 않도록 탄원서까지 써주셨다”고 소개했다.

이후 김준곤 목사는 1951년 목사 안수를 받고 전남 영광군 법성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한 후, 1953년 3월 광주 서부교회(현 서현교회)에서 6개월 간 목회 후 광주숭일중고등학교 교목과 교장으로 재직했다. 또 애양원 한성신학교에서 한 학기 강의 후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1958년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설립하고, ‘오늘의 학원 복음화는 내일의 민족 복음화, 오늘의 민족 복음화는 내일의 세계 복음화’,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슬로건을 걸고 대학생 선교를 기반으로 민족 및 세계 복음화 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김철영 목사는 “김준곤 목사님의 역사 정리의 한 매듭을 푼 것 같다”며 “또 목사님의 본래 출생 연도는 1924년인데, 호적상은 1925년이다. 1925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김준곤 평전’ 등을 출판해, 다시 한 번 민족복음화 운동의 불씨를 되살리고 싶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