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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태복음 21장 28-31절)”.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음흉한 질문을 막으신 뒤 ‘두 아들 비유’로 이들의 잘못된 생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맏아들을 유대인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유대 종교 지도자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않고, 말로는 순종한다 하나 실제로는 순종치 않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태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세리들과 창기들 같은 죄인 또는 하층 계급 사람들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처음엔 순종을 거부했지만, 곧 뉘우치고 하나님 뜻대로 행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겉으로 드러난 자신의 잘못된 모습이 죄인 됨을 알았기 때문에 구세주를 절실히 필요로 했고, 죄 문제를 해결하는 복음에 대해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세리들과 창기들은 하나님 말씀과 거리가 먼 죄인들임에도 회개하며 요한의 세례를 받은 반면,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엄수하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거부하고 있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도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중에 하겠습니다” 등 대답은 쉽게 잘 합니다. 늘 어머니로부터 “대답은 잘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대답은 손쉽게 잘 하지만 실천력이 없다고 꾸중을 들은 적 있으시죠?

어떻게 보면 별 생각 없고, 부모님에 대한 진정한 배려가 없는, 나만을 위한 마음 편하고 무책임한 대답이었습니다. 부정적으로 대답하면 잔소리가 들리니, 순간의 불편을 모면하기 위해 긍정적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 ‘두 아들 비유’가 곧 우리를 보고 하시는 말씀 아닐까요? 아버지께서는 두 아들에게 제각기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일렀습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가겠다고만 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작은 아들은 싫다고 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포도밭으로 갑니다.

결국 두 아들 모두 아버지의 말을 거부한 셈입니다. 당시 가부장제 시대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가겠다고 해놓고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은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포도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아버지의 요청에 즉시 “예”라고 답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언행일치’일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두 아들 비유’는 말이냐 실천이냐, 고집이냐 회개냐 중 양자택일의 말씀입니다.

대답은 ‘예’ 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거짓이 되지만, 대답은 ‘아니요’ 했지만 행동했다면 어떨까요? 애초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했지만 거짓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자기반성이 아닐까요?

특히 전도활동에 도전해 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님은 그들의 불의와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 오늘 ‘두 아들 비유’를 통해 우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진리 앞에서 그동안 지닌 그릇된 마음과 태도를 바꾸고 회개할 줄 아는 융통성을 지니기를 당부하십니다. 더구나 아버지와 아들에게는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생겨나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로 신뢰가 향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삶에서 소중한 가치이자 소통의 열쇠가 되는 신뢰에 대해 한층 더 깊이 묵상하고 신뢰를 키우고 강화해, 서로에게 신뢰가 깃든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두 아들 비유’는 세상과 교회에서의 ‘이중 생활’을 꼬집어 쉽고도 명쾌하게 풀어주신 말씀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같이 섬기려 하는 오늘날 신앙인들이 부지기수로 많음을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슬픈 마음을 헤아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준엄한 명령을 깊이 묵상하고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기며 사랑하는 신앙인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모래알처럼 셀 수 없는 죄를 짓고도 오히려 자신이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처럼 둔갑하고, 약속을 어기며 변명과 거짓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의 ‘두 아들 비유’가 세상을 향한 노아시대 대홍수가 재현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됩니다.

위선과 거짓이 춤을 추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두 아들의 이야기를 그냥 흘려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두 아들 비유’를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깨어 기도하며 세상에 점령당하지 말고 세상을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으로서 사명을 제대로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어린 시절 기독교인들을 존경하고 신뢰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각자 교회 안에서 세상을 위한 배려와 사랑을 배우고 나누던 그 시절을 다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이단 사이비를 제외해도 많은 교단들이 있습니다. 각자 교단들이 세상을 위해 많은 선한 일들을 하고 있지만, 오늘 주제인 ‘아버지의 두 아들’ 같은 사건들이 버젓이 활개치고 있습니다.

모두 한 마음으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많은 아이디어를 창출해, 예수님의 명령에 즉답으로 ‘예’ 대답하며 실천하는 귀한 종들이 됩시다. 그런 종들이 되기 위해 필자의 오늘 제안을 실천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일제강점기와 6,25 동란을 거친 수많은 교회 중 순교를 당한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기철 목사님, 원수를 양아들 삼은 손양원 목사님 같은 순교자들을 조사해, 교단과 교회가 연합하여 그들의 신앙생활을 널리 알리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피, 땀, 눈물을 흘렸던 애환들을 소개해 믿지 않는 비신앙인들에게 선교의 일환으로 널리 알리면 좋겠습니다. 요즘 유튜브를 통한 복음 전도는 더욱 좋은 효과가 넘쳐나리라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C채널 프로그램 중 주일 낮 오전 방영하는 ‘성지가 좋다’는 참 알찬 방송입니다. 저는 만사를 제쳐두고 시청하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교단을 초월해 많은 순교자들을 찾아내 그들의 진정한 삶과 나라와 민족을 위한 희생, 도덕과 윤리,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놓은 삶들을 하나하나 소개한다면 복음전도에 많은 힘이 되고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모든 일을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오늘 ‘두 아들 비유’처럼 우리 신앙인들은 늘 그 자리에서 안주하며 “여기서 초막 셋을 짓자”던 제자와 무엇이 다를까요?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 하나하나 계획대로 실천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는 순간까지 빈틈없이 세상을 사랑해 주심을 깨닫고, 각 교단 지도자들은 믿음으로 한데 어울려 주님의 전도 사역을 하나하나 빈틈없이 해 나가야겠습니다.

말은 쉽게 하면서 실천력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의 정신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생각과 마음을 연합하여, 어떤 위협이 도사리더라도 난관을 뚫고 헤쳐 나가는 신앙인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