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예루살렘 폐허 벤더만
▲19세기 독일 화가 에두아르트 벤더만(Eduard Bendemann, 1811-1889)의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주저앉은 예레미야(Jeremia seated in the ruins of Jerusalem, 1837)’.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한복음 15:5-6)”.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은 줄기이고 신자들은 가지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자신은 가지까지 포함한 포도나무 전체라고 말씀하신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자격과 권리를 가집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의 지체로서 서로 협력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동등한 자격과 권리를 이용해, 주님의 정신과 무관한 신앙생활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아닐까요?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는 뜻은, 불을 붙여 피우다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불에 던져져 계속 괴로움을 당하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다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돌아오는 것은 욕설과 심한 조롱뿐이었습니다. 구약의 대표적 예언자 예레미야는 제사장 가문 출신입니다. 그는 B.C. 627년쯤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목회자가 제사장과 예언자 역할을 겸하고 있지만, 구약 시대 제사장은 국가 종교의 공식 직책이고, 예언자는 비공식 재야 활동가였습니다. 제사장보다 예언자가 훨씬 위험하고 고된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급하게 예언자로 부르실 때는 상황이 매우 긴박한 경우인데, 예레미야가 바로 그 장본인입니다.

이때는 국제 정세의 대전환기였습니다. 앗시리아 제국이 쇠퇴하고 신흥강국 이집트와 패권 전쟁이 격화될 무렵입니다. 두 강대국 사이에 낀 이스라엘은 국제 관계에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분열이 생겼습니다.

특히 야심차게 개혁을 추진하던 요시야 왕이 전사하고 갈팡질팡하던 이스라엘은 급기야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10년 후 예루살렘이 초토화됐고, 왕과 지도자들은 멀고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러한 혼란기에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실제로 예레미야는 멸망해가는 조국의 현실을 눈으로 직접 지켜봐야 했고, 그 가운데 피를 토하며 눈물로 구원의 길을 선언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롱과 폭력, 납치였습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친이집트 파에 납치돼 잔인하게 살해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예레미야는 B.C. 627년경부터 B.C. 587년까지 40년 동안 사역을 하였습니다. 이 시기 유다 왕으로 요시야 외에도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뿐 아니라, 모든 이방 국가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 말씀을 대언토록 부르심받은 선지자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렘 1:11-12)”. 여기 살구나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쇠케드’는 지키라고 번역된 ‘쇼케드’와 어원이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지켜질 것임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향해 온갖 불평을 터뜨리고 하나님의 꾐에 빠졌다며 한탄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비웃고 놀리고 박해합니다. 이것이 예언자가 담당해야 할 운명입니다.

예레미야는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해 보지만, 뼛속까지 새겨져 있는 하나님 말씀에서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열정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입을 열어 죽음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길이 수난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세상과의 타협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신앙의 길은 주님께 의탁해야 하고, 도움의 은총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주님께서 가신 길임을 확실하게 신뢰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고통의 길이지만, 사랑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요구에 머물지 말고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하나님 말씀은 달기보다는 쓰기 마련이며, 이는 말씀을 전하는 이의 앞길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레미야의 회피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이시고, 예레미야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평생 눈물의 예언자로 폭력과 위협의 두려움 속에 살다 마침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가 외친 음성과 삶은 후대에 예언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길이 보여주는 모범답안이 됐습니다.

시대를 정직하게 통찰하며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외치려는 사람들에게, 예레미야는 십자가의 길과 영원한 삶의 모습을 남겨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고생스럽고 고달픈 수난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었던 예언자였으며, 신약 사도 바울은 하나님 뜻에 걸맞은 삶을 살고 그것을 산 제물 삼아 하나님께 바치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삶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참된 신앙의 길을 제시합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마음에 합한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라,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맞는 삶을 기쁘게 받아주시며,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도록 힘쓰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은 예레미야나 사도 바울과 달리 하나님께서 친히 허락하신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불평과 불만 속에 늘 하나님을 원망하여 유한한 세상 일에 쫓겨 감사해야 할 시간조차 불평하면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신앙인들에게 들려주는 예레미야의 이야기를 한쪽 귀로 흘리지 말고, 지금 풍족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늘 묵상하며, 교만과 아집, 자랑과 탐욕을 내 안에서 몰아내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무겁게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늘 함께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는 값지고 복된 거룩한 십자가의 삶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