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 자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중 배신한 제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찾아와 입맞추는 모습.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두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태복음 13:30)”.

이 비유의 말씀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으나, 악인들에 대한 즉각적인 심판이 유보된 채 선인(하나님의 자녀)들과 악인(사탄의 자녀)들이 섞여 살다가 세상 끝 곧 예수님의 재림 때 최종 심판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통치가 실현될 것임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특히 가라지는 독을 지닌 해로운 잡초였으므로 뽑아 버려야 했지만, 초기에는 밀과 벼 나무가 흡사하기 때문에 분별해 내기 어렵고 이삭을 팰 무렵에야 비로소 구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때 밀과 벼 가라지의 뿌리가 얽혀 있어 가라지만 뽑을 수 없으므로, 추수 때에 비로소 가려내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라지 비유가 나타내는 뜻은 세상에는 선과 악이 병행하고 있지만, 이것을 구별해 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추수 때, 즉 마지막에 있게 됩니다. 마지막에 심판하는 것은 생애 한 기간이 아니라, 전 생애를 심판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고유권한이므로 섣불리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자기 중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인 판단과 심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될 것임을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더구나 요즘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나라와 나라 사이 전쟁은 물론, 이상기후로 인한 인류의 고통으로 긴 한숨을 쉬며 하늘만 쳐다보게 됩니다. 긴 장마 속에서 벌어지는 홍수와 산과 들, 가옥과 제방까지 무너져 이재민이 발생하고 사람의 목숨까지 희생되는 안타까운 소식들이 매일같이 들려오고 있음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세상 끝날 심판의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 아닐까요?

이 모두는 인간들의 나쁜 탐심으로 인한 무분별한 생태계 파괴, 탄소 배출로 지구의 수명이 점점 종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가라지 비유의 추수 때가 실현되는 그날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사악한 죄의 놀이만 되풀이하며 노아의 홍수 때처럼 배가 문을 닫고 난 뒤에서야 구원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피의 목소리가 지금도 메아리치고 있는 듯 들려옵니다.

종들이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 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가만 두어라”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자라도록 그냥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 옳은 밀과 벼를 뽑게 되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추수 때까지 그냥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밀과 벼가 가라지에 눌려 전혀 수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초대교회가 겪은 어려움에 대한 답변인 동시에, 오늘날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빚어지는 갈등과 하나님의 부재를 말하는 이들에 대한 주님의 준엄한 말씀입니다.

가라지가 좋은 씨앗인 밀, 벼와 더불어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악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를 드러내는 사랑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가라지를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내는 하나님 편의 승리를 즉시 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성급함을 깨우치게 하며,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인내와 절제력을 키우도록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더라(마태복음 17:17)”.

세 제자가 산 위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형을 체험하는 동안, 다른 제자들이 산 아래에서 한 아이를 심히 괴롭히며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로부터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받았던 제자들의 무기력함은, 그들의 믿음과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아이 아버지의 불신앙을 책망하시며 귀신을 쫓아주심으로써, 아이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리고 병 고치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지만,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하는 역설적인 진리가 제시됩니다.

특히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예수님께서 세우시려는 하나님 나라의 뜻을 몰랐고, 그들의 판단과 생각으로 명예, 권력, 지위를 누리기 위해 경쟁하는 현세적 국가관을 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누가 크냐, 누가 더 높으냐’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길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함을 교훈해 주십니다.

고대 세계 이스라엘과 우리나라에서 어린아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어린아이조차 소중히 여기고 관심을 쏟으며 섬기는 자세가 하나님을 섬기는 제자의 자세임을 강조하십니다.

가장 위대한 사람은 가장 작은 이로 보이는 이들을 겸손하게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누가 높고 낮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선하고 악하냐, 누가 겸손하게 예수님을 영접했느냐로 최종 구원의 승리를 쟁취하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그릇된 가르침으로 양들이 옳은 판단을 하지 못해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던 시대나 지금 시대가 흡사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고유 영역인 판단과 심판을 함부로 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패역한 세대여” 하시며 한탄하시는 주님의 음성에는, 이 말씀이 인륜에 어긋나고 불순함이란 ‘비뚤어진’ 의미로 사용됐음을 나타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의 잘못된 생각과 섣부른 판단이 빚어낸 놀라운 참사는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해했던 비극이 늘 따라다니며 괴로움과 고통을 겪는 인간의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가 누구를 향한 책망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제자들, 그들을 바라보며 조소하는 바리새인들 모두를 포함한 그 시대 종교 지도자들과 악한 무리들을 일컫는 것 같습니다.

특히 죄를 지어도 죄인 줄 모르고, 이웃에 고통을 안겨줬어도 양심의 가책까지 무너져 내린 오늘날 세상은, 가라지 비유를 통한 신실한 회개로 늘 기도하며 정직하고 겸손한 자세로 타작마당에 참여해야 함을 알려줍니다.

가룟 유다를 보고 저주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가룟 유다보다 못한 사람들이 더 많은 이 시대입니다. 가룟 유다는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꼈습니다. 하지만 구원을 얻을 방법과 회개의 합당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목숨을 함부로 끊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양심마저 저버린 현 시대 악한 사람들은 “패역한 세대여”라고 한탄하시는 주님의 외침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또 스스로 밀과 벼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혹 가라지의 모습이 있지 않은지 돌아보길 바랍니다. 스스로 가라지라고 생각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어 삶의 자세를 전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가라지는 남들이 자신의 악행을 모르는 줄 알고 자신은 더 위대하다고 판단하며 위세를 떨지만, 사실은 옳고 선한 것이 망가질까 봐 자신을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타작마당까지 가기 전에 회개의 마당에 참여할 기회를 주셨건만, 날이 갈수록 교만과 심한 악행 때문에 더욱 심한 악취로 물든 가라지의 종말을 생각하며, 다시금 새 희망 새 빛으로 다가가 그들을 구원해야 하겠습니다.

가라지와 더불어 선민들도 세상을 이겨나갈 강한 믿음과 용기로 앞장서 나아가는 십자가 군병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두라”는 주님의 신비스런 음성이 무슨 뜻인지 분별하는 귀한 종들 되시기 바랍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