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말 ‘따라하며’ 공감 표시
비언어적 메시지도 함께해야
상대 정서 이해 위한 진솔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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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의사소통(意思疏通) - 의사(意思) = 소통(疏通)

소통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소통을 화두로 내세우는 교회학교 교사들은 많다. 그러나 정작 소통을 위해 연습을 하는 교사들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소통불가’, ‘불통’이라는 단어들이 요즘 교회 안에서도 쉽게 들리는 것 같다.

학생과 선생님이 서로 이해를 못한다. 심지어 부모와 자녀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매년 부모님들이 필자를 찾아와서 하는 이야기들 중 가장 많은 부탁은 이것이다. “우리 아이와 이야기 좀 잘해 주세요.”

그렇다고 필자 역시 부모님들의 기대만큼 모든 아이들과 대화가 잘 되는 것은 아니다. 필자 역시 갈수록 소통하기가 힘이 드는 것 같다.

‘공감도 배워야 하다니!’ 지난주에 ‘공감’을 주제로 글을 쓰고 난 뒤 주위 분들의 반응이었다. “공감은 학습을 통해서 길러진다”는 말에 적잖은 고민이 든다고 했다. 본인들은 공감을 타고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학습’이라는 말을 들으니, 이 또한 공부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 답답한 내색을 비추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공감이 없으면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이다. 기름칠을 하지 않으면 뻑뻑한 기계 소리가 들리듯, 공감하지 못하면 소통에 삐그덕거림만 남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갈수록 소통하기가 힘든 것일까?
부모와 자녀는 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학생과 선생님은 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 대답 중 하나가 의사소통에 있다고 생각한다. 권수영 교수는 《공감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소통이 안 되는 이유는 여러분이 자꾸 ‘의사소통’을 하려 들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권수영 교수의 말이 정말 맞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모두 의사소통을 하기 원하기 때문에, 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의사소통(意思疏通)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 뜻이나 생각(意思)’이 ‘소통(疏通)’되는 것이다. 여기서 ‘의사’는 결국 나의 뜻과 나의 생각이다. 나의 뜻과 생각이 소통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나? ‘쟤는 왜 이해를 못 하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왜 못 알아듣지? 머리가 나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몇 번 설명을 해보다가(그나마 몇 번 설명이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안되면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내 기준으로 소통을 하려 했기 때문이다.

교회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선생님들 중에는 ‘소통이 안 돼요’ 하면서 피로감을 호소하는 분들이 꽤 많다.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문제의 원인은 ‘의사(意思)’에 있었다.

선생님의 생각과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이 답답하다고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선생님은 학생의 이해력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다.

소통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머리로만 이해하려 하면, 가슴이 답답해질 뿐이다. 서로가 답답하다. 권수영 교수는 이런 말도 한다.

“소통하고자 하는 상대방의 머리만 문제 삼고 있다면, 결코 제대로 된 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소통은 머리뿐 아니라 가슴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서로 소통을 원한다면, 시선이 가슴에서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같은 지점에서 만나야 소통이 될 수 있다. 다른 지점에서 만나면 불통이 될 뿐이다. 그러니 교사라면 의사소통을 고집하기보다는 소통을 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대화의 일반화는 관계의 사막화이다

소통을 하려면 자세히 봐야 한다. 학생의 하나를 보고 열을 알려 하면 안 된다. 적어도 여섯 개나 일곱 개는 보고, 열을 알려고 해야 한다. 이 말은 소통을 하려면 성급한 일반화를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자주 하는 실수 중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1반의 철수가 지각을 했다.
1반의 영희도 지각을 했다.
그러므로 1반 학생들은 모두 지각을 했다.

일부 사례만을 제시하거나 대표성이 없는 불확실한 자료만을 가지고 결론을 도출하는 데서 발생하는 논리적 오류이다. 그렇게 보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 역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물론 이 말이 주는 의미는 다른 데 있지만, 적어도 소통이란 관점에서 보면 너무 위험한 말이다. 어떻게 학생의 하나 혹은 둘만 보고 열을 알겠는가!

이런 오류는 삶에서만 자주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에서도 자주 이루어진다. 이런 식이다. 한 고등학교 학생과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목사님! 저는 요즘 다 우울한 것 같아요.”
“응? 너도? 나도 그래. 요즘엔 주변에 우울한 사람이 많네. 힘내!”

크게 문제 없는 대화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점들이 많다. 첫째, 공감형 대화가 아니다. 지난 글처럼 물어야 했다. “그래서 저는 지금 괜찮아?” 먼저 학생이 어떤 상태인지를 확인했어야 했다.

둘째, 학생의 우울함과 나의 우울함을 동일시한 것이다. 10대의 우울함과 40대의 우울함은 다를 확률이 높다. 삶의 자리도 환경도 다르기에, 어떤 점이 우울한지를 물었어야 했다.

셋째, 그 친구와 나와의 몇몇 케이스만 보고, 우리 주위에는 우울한 사람이 많다고 단정지은 것이다.

이렇게 단정지어서 성급하게 일반화를 시켜버리면, 갑자기 학생은 할 말을 잃는다. 학생은 생각한다. ‘내가 철이 없어 우울한 것인가?’ 혹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들 우울하게 사는 거였네’.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나면, 학생은 자신의 아픔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학생의 마음을 곪게 만들어 버린다. 더 이상 대화도 진행되지 않는다. 관계의 사막화가 시작된다.

상담학에서는 사막화를 방지하기 위한 ‘미러링(Mirroring) 기법’이라는 것이 있다. 미러링 기법은 쉽게 말해 ‘따라하기’이다. 학생의 마지막 말의 어미를 반복하는 것이다. “(학생의 마지막 문장을 받아서) 정말 그랬다고?” “그렇구나. (학생의 마지막 문장을 반복).”

여기에 비언어적 메시지(눈 맞춤, 끄덕임, 미소 등)를 함께 표현한다면, 깊은 공감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그렇다고 대화의 끝에 항상 상대방을 따라 하거나 “~구나”를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정서를 이해하겠다는 진솔함이다. 이재은 아나운서도 《다정한 말이 똑똑한 말을 이깁니다》에서 말한다.

“꼭 말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거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어요. 누군가 나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자주 끄덕여 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이고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잖아요.”

소통은 어렵지 않다.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면 성급하게 동의하려 하지 말자.
해결책부터 제시하려 하지 말자.
‘어떤 대답을 할까’ 머리부터 굴리지 말자.
대신 아이의 눈을 보며,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시작만 하자.

“그렇구나. 그래서, 지금은 어때?”

김정준 다음 세대
▲김정준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정준 목사

울산대흥교회 교육목사
영남신학대학교 신학과·신학대학원
전남대학교 대학원 문학 석사
한남대학교 대학원 박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