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결보다는 공감과 리액션이 먼저
있는 그대로 알고자 하는 것, 공감
자세히 알아야, 이해 및 공감 가능
아이들, 답 아닌 공감과 격려 원해

응답하라 1994
▲드라마 <응답하라 1994> 티저.
#공감이 먼저다

언젠가 한 청년이 물었다.

“목사님! 어제 저희 집에 페인트칠을 새롭게 했어요. 그런데 페인트 냄새가 너무 심해서 머리가 정말 아파요. 창문을 닫고 있으려니 페인트 냄새 때문에 죽겠고, 창문을 열면 매연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아요. 그럼 창문을 열어야 할까요? 아님 닫아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시 고민을 한 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음, 열어야지. 집에 마스크 있지? TV에서 봤는데 페인트 독성이 장난이 아니래. 문을 닫으면 페인트가 잘 안 마르니까, 머리가 더 아플꺼야! 마스크를 쓰고 좀 열어 놓자!”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실제로 이 질문은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유명한 대사이다. 사실 이 질문의 대답은 창문을 여닫는 데 있지 않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그래서 너는 지금 괜찮아?”라고 먼저 묻는 것이다. 머리가 아프다는 뉘앙스의 말을 3번이나 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항상 교사 세미나를 가면 이 질문을 꼭 한다. 대부분의 (남자) 선생님들의 대답은 이렇다. “그럼에도 창문을 열어야죠!” 혹은 “창문을 열어 놓고 친구 집에 가는 건 어떨까요?”

지난 주 한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병원에 데려가야죠.” 참신한 대답이기는 했으나, 결국 모든 대답은 해결에 맞춰져 있다. 여기에 우리의 약점이 있다.

다음 세대를 지도하는 교사의 대부분은 ‘해결’에 초점이 있다. 문제가 생기면 일단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에 모든 관심이 집중돼 있다. 물론 애정이 있기 때문에 해결하려 한다.

다만 해결부터 시작하면 정작 당사자의 상태가 잘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아픈지, 어디가 아픈지, 지금은 괜찮은지’를 먼저 묻고 해결을 해도 되는데, 우리는 이성적인 해결에 시작점을 둔다. ‘답부터 말해야지’라는 생각으로, 공감이 아닌 해결책을 쏟아 놓는다.

21세기는 공감의 시대이다. 공감은 ‘타인의 상황이나 기분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저 사람이 슬플 때 나도 슬프고, 저 사람이 기쁠 때 나도 기쁜 것, 그것이 공감이다.

과거 인류의 역사 속에서는 감성보다 이성이 훨씬 더 우위에 있었다. 덕분에 공감하지 못한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 지금은 공감하지 못하면 관계를 맺기 힘들다. 미국 경제학자인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인류를 이렇게 정의했다.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 공감하는 인간

바야흐로 공감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특히 코로나 이후 공감의 영향력은 더욱더 확대되었다. 비대면 시대를 경험한 인류는 감정적 연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해결보다는 공감과 리액션이 먼저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다음 세대 교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아이들 문제를 함께 해결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문제를 가지고 내 앞에 온 그 아이의 마음이다. 그 아이 상태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공감이 먼저이다.

#공감은 신발을 바꿔 신는 것이다

공감은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필자는 세미나 때 공감을 이야기하면서 이 그림을 사용한다.

공감
공감은 내 신발을 벗고, 타인의 신발을 신어 보는 것이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선생님 입장에서 벗어나 학생 입장에 서 보겠다는 것이다.

일본 작가 브래디 미카코(Brady Mikako)는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에서 말한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은 누군가에게 나를 투사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있는 그대로 알고자 하는 것이다. 타인이 나와 다른 존재로서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성질을 갖고 있더라도 그 존재를 인정하고 상상해 보는 일이다.”

미카코는 내 신발을 벗으라고 말한다. 자신의 신발을 신고 보면 상대방은 그저 타인으로 보일 뿐이다. 내 신발을 벗고 상대방 신발을 신으려고 시도하는 것, 여기에서 공감이 시작된다.

그럼에도 많은 교사들이 공감을 어려워한다. 어떤 교사들은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분도 계신다. 그렇지 않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은 《당신이 옳다》에서 말한다.

“자세히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공감할 수 있다. … 감정적 반응은 공감이 아니다. 한 존재가 또 다른 존재가 처한 상황과 상처에 대해 알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존재 자체에 대해 갖게 되는 통합적 정서와 사려 깊은 이해의 어울림이 공감이다. 그러므로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학습이 필요한 일이다.”

정혜신 의사는 공감은 노력하면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대로 공감은 감정적 호들갑이 아니다. 오히려 사려 깊은 이해와 어울림의 감정이 공감이다. 격양된 목소리의 동조가 아니라 따뜻하지만 조용한 손길 한 번이 더 깊은 공감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니 꼭 텐션 높은 공감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저 문제가 있어 보이는 그 아이를 자세히 관찰하고, 따뜻한 손길 한 번, 따뜻한 말 한 번이면 충분하다. 혹여 아이의 아픔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조심스레 물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또한 학생의 신발을 신으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는 공감하는 교사가 필요하다

교사는 예수님의 공감법을 배워야 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최고의 공감쟁이셨다. 이정일 목사는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깊게 만드는가》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예수님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는데, ‘불쌍히 여기사’가 그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셨기에 나환자에게 서슴없이 스킨십을 하셨고, 사마리아 여인과도 말을 섞으셨으며, 나사로의 죽음 앞에선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에는 공감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고, 예수님을 만나면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이다.

다음 세대는 답이 아니라 공감을 원한다. 기실 사역을 해보니, 나를 찾아오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 나를 찾아온 이 아이는 내 대답을 듣고 싶어서 찾아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선택에 대한 공감을 원했다. 자신이 얼마나 힘든 선택을 했는지, 혹은 그런 선택에 대한 지지를 받고 싶은 것이다. 격려받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해결책만 말하면 어찌 될까?
내가 생각하는 대답만 말하면 어찌 될까?
창문을 열고 닫는데만 집중하면 어찌 될까?

기회를 놓치게 된다. 더 많은 아이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날리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라떼 이즈 홀스’를 시전하게 된다(‘나 때’와 비슷한 발음인 ‘라떼’, ‘는’은 영어로 is, ‘말이야’는 horse, 꼰대가 하는 말을 비꼬는 말이다).

오늘 다음 세대가 나에게 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화를 시작해야 할까? 아이의 눈을 보며 가장 먼저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래서 너는 지금 괜찮아?”

김정준 다음 세대
▲김정준 목사. ⓒ크투 DB
김정준 목사

울산대흥교회 교육목사
영남신학대학교 신학과·신학대학원
전남대학교 대학원 문학 석사
한남대학교 대학원 박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