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중 가장 위험했던 순간,
인민군 패배하여 쫓기던 9월 말경
퇴각하며 씻을 수 없는 상처 남겨

서울신대
▲강좌가 진행되고 있다. 왼쪽부터 윤정란 교수, 박명수 교수, 장금현 박사, 박종현 교수, 박창훈 교수. ⓒ서울신대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창훈 교수) 제27회 영익기념강좌가 ‘지역사회(로컬리티)와 한국전쟁 그리고 기독교’라는 주제로 25일 오후 부천 서울신대 본관 소강당에서 개최됐다.

이날 강좌에서는 소장 박창훈 교수 사회로 명예소장 박명수 명예교수(서울신대)가 ‘논산군 성동 지역 근현대사와 6.25 전쟁,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피해’를 제목으로 발표했다. 박 교수는 최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김광동)’ 의뢰로 6.25 당시 북한 공산군에 의한 기독교인 학살 보고서를 펴낸 바 있다.

박명수 교수는 “6.25 전쟁에 관한 연구는 여러 차원으로 진행됐다. 국제적 차원에서는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 국가적 치원에서는 김일성-이승만의 통일전쟁, 마을 차원에서는 전쟁 당시 벌어진 지역 갈등이 각각 중심이었다”며 “저는 마을 차원의 6.25 전후 상황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특히 논산군 성동면의 피해 규모는 이제까지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다”고 전제했다.

박 교수는 “6.25 당시 논산군 피해 규모는 1,200여 명에 달하는데, 그 중 600여 명이 성동면의 피해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기독교인이 140여 명”이라며 “성동면 병촌교회를 중심으로 66명이 희생된 것은 널리 알려졌지만, 우곤교회에서 73명의 피해가 있었다는 증언이 처음 나왔다. 이는 전남 영광 염산교회 77명에 이어 두 번째 큰 규모로, 이에 대한 최초의 연구”라고 밝혔다.

그는 “논산 지역 본격적 선교는 1903년 감리교 선교사가 공주를 거점으로 주변을 돌면서 시작됐다. 이곳에서 기독교는 처음에 전통문화와 대결해야 했다”며 “선교사들은 성경 교육을 위해 한글을 먼저 가르쳐야 했다. 그래서 학교를 세우기 시작, 1909년 영화여학교와 진광남학교를 세웠다. 강경 지역도 1907년 감리교에서 선교를 시작해 1909년 만동학교를 세웠다”고 소개했다.

또 “성동 지역 기독교는 논산보다 강경 영향이 더 컸다. 강경감리교회 전도로 시작된 우곤감리교회가 그 출발로, 만동학교 분교 형태로 1918년 시작했다”며 “우곤교회는 오랫동안 강경교회 엡윗청년회 노동야학생 백경원 집에서 예배드리다, 1934년 예배당을 신축했다. 이후 강경성결교회 지교회로 1933년 이태석 전도사에 의해 초가 9칸의 집을 구입한 병촌교회가 설립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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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전 예배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신대
박명수 교수는 “해방과 정부 수립이 지나가면서 이 지역에서 기독교와 좌익 세력은 더욱 적대적 관계가 형성된 것 같다. 당시는 이데올로기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우익 입장에 서게 됐다”며 “각 지역 부락 단위에서는 좌익의 시위가 있었고,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이들을 막으려 시도했다. 성동면에서는 심각한 좌우 갈등이 벌어졌다”고 전했다.

박 교수는 “6.25 전쟁 발발 후 논산·강경 지역은 7월 17일 점령됐고, 대대적인 우익 숙청작업이 진행됐다”며 “김주옥의 증언에 의하면 성동 지역 학살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됐는데, 7월 21(28?)일 1차 학살이 시작됐고, 8월 2일 2차 학살로 21명이 죽고, 8월 22일 3차로 원남리에서 20명이 학살당했고, 9월 27-28일 4차로 우익 인사와 가족 600여 명이 학살당했다. 그 중 병촌교회 성도 66명(집사 1명, 세례교인 14명, 학습교인 12명, 구도자 8명, 유년부 어린이 22명, 유아 9명)이 순교당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그러나 성동 지역의 이 같은 피해는 기본 윤곽도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다. 기독교인들의 피해는 더 파악되지 못했다”며 “논산 다른 지역에도 일찍이 기독교가 들어왔고, 이들은 좌익의 협조 세력이 아니었으므로 여러 종류의 마찰이 있었을텐데, 기존 조사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성동면의 좌우 조직과 기독교의 관계는 더욱 밝혀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박명수 교수는 “6.25 전쟁 중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인민군이 패배하여 쫓기던 9월 말경이었다. 김상옥의 가정은 기독교인이며 우익 활동을 했기에 인민위원회의 감시를 받고 있었지만, 가족들 가운데 좌익이 있어 인민위원회 정보를 알고 있었다”며 “당시 퇴각하던 좌익들은 우익들이 탈출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산봉우리마다 죽창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여기에는 우곤리 교인들도 참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퇴각하는 좌익들은 이 지역 기독교인과 일반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우곤리 교인들은 엄청난 수난을 당했다.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사람은 김씨 집안”이라며 “김씨 집안은 30명 넘는 온 가족이 신앙생활을 했으나, 인민군들이 퇴각 과정에서 모두 살해했다. 특히 어린아이부터 차례로 32명이 살해당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그는 “다음으로 이 지역 최대 부자인 박씨 집안을 비롯해 전북에서 이주해 온 박은춘 권사 가족, 이관호 가족, 서승천 집사, 조창식 가족 등 우곤리 지역에서 73명이 살해당했다고 이 지역 김상옥은 주장한다”며 “앞으로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와 함께 “병촌교회에서도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실질적 개척자 우제학은 공격 대상임을 알고 일찍이 숨었지만, 돌아왔을 때 가족 11명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김기환 씨도 가족 16명이 한꺼번에 살해당했다”며 “병촌교회 피해자 대부분은 경주 김씨 집안으로, 35명에 달해 전체(66명)의 절반을 넘었다. 김주옥은 이런 가정의 아픔을 품고 위로하며 전쟁 후 가족과 교회, 지역사회를 위해 일했다”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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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서울신대
이후 분석에서 박명수 교수는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6.25 전쟁 기간 민간인 피해를 계층과 씨족 간 갈등 측면에서 파악했지만, 지나치게 단순화해선 안 된다. 해방 후 논산 인민위원장은 지주였다”며 “각 지역 좌익 지도자도 유지 층에 해당했다. 이들은 소작인이나 머슴들, 서자들을 동원해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학살을 자행했다”고 했다.

둘째로 “6.25 전쟁 가운데 피해는 상당 부분 해묵은 가문 갈등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당시 어느 편에 설 것인가는 가문의 문제가 아닌 개인 혹은 한 가정의 문제였다”며 “우곤리 김상옥 집안도 좌우익이 공존했던 것처럼, 가문 문제로 접근한다면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당시는 전통 봉건사회가 무너져 정치 성향도 가문이 강요할 수 없는 개인적 결단의 영역으로 전이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셋째로 “기독교는 대부분 우익 세력과 결합돼 있었다. 좌익은 계급투쟁을 통한 혁명을 꾀했지만, 기독교인들은 점진적 개혁을 추진했다”며 “해방 후 좌익과 우익이 대립했을 때 기독교는 대부분 우익에 섰고, 미군정 등장과 함께 한국 사회의 중심이 됐다. 정부 수립 후 기독교인들은 각종 우익단체에 가입, 교회 조직은 그 채널이 됐다. 이는 전쟁 중 좌익에 의한 박해로 이어졌다”고 풀이했다.

박 교수는 “기독교인들은 각종 우익 단체들을 통해 외부 세력과 연결돼 있어, 좌익들에게 위협적 세력으로 간주됐을 것이다. 이에 기독교인들에 대한 잔인한 학살이 이뤄졌고, 기독교인들은 민주 진영에 속하게 됐다”며 “전쟁 속 기독교인 피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이들이 인민공화국 건설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념을 제외하고 단순한 반상·씨족·종교의 갈등으로 축소하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성동면은 6.25 당시 전라도를 빼면 가장 많은 인원이 희생당한 지역으로, 이는 일제 시기부터 지역에 좌익 사상이 강했고 6.25 때도 강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라며 “이들에게 이 지역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는 우익의 일원이며, 반공 집단이었다”고 정리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박해 이후 직접 복수에 나서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병촌교회 김주옥은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좌익) 정씨 집안 딸과 결혼하고 화해하려 했다. 우곤교회도 보복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며 “이런 측면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나름의 신앙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다고 본다”고 했다.

이와 함께 “논산 성동 지역에서 살해를 주도했던 세력이 누구인지 보다 정밀한 연구가 진행돼야 한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아있어, 제대로 된 접근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라며 “원남리·우곤리는 정확한 피해자 명단 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대규모 피해는 정부가 보다 책임을 갖고 본격적으로 조사에 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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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촬영 모습. ⓒ서울신대
이에 대한 논찬은 윤정란 교수(숭실대)가 맡았다. 이어 장금현 박사(서울신대)가 ‘군산지역과 한국전쟁: 기독교인의 집단희생을 중심으로’를 발표했으며, 박종현 교수(연세대)가 논찬했다.

앞선 예배에서는 연구소 박문수 박사의 기도 후 김헌곤 목사(전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장)가 ‘6.25 전쟁 피해와 한국교회의 사명(마 16:21-24)’을 제목으로 설교했으며, 진실화해위원회 김광동 위원장이 영상으로 축사를 전했다.

영익기념강좌는 연구소 설립기금을 기증한 故 김영익 집사를 기념해 지난 1997년부터 매년 봄 열리는 학술강좌로, 저명 학자들을 초빙해 한국교회 및 복음주의 운동의 최근 이슈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날 유족 대표로 김 집사의 장남 김승환 집사가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