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
▲세례 요한.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누가복음 3:22)”.

여기서 비둘기라 함은, 성령님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성령님이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42장 1절에 있는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라는 구약의 약속이 이뤄진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한 것은 구원 사역을 위해 예수님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무장시킨 것이고, 또한 그 분을 왕으로 세우는 기름 부음을 뜻하며, 이스라엘을 사랑과 공의로 다스리실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성례의 하나로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는 예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접붙임 받음과 은혜와 언약의 혜택들에 참여함과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된다는 약속을 표시하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로마서 6:6)”.

여기서 옛 사람이라 함은 ‘거듭나지 못한 자’를 말하며, 우리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가르칩니다.

때문에 믿는 자는 죄의 영역에서 새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지고, 죄가 우리 위에서 왕 노릇하지 못하며, 우리 믿는 자들을 주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죄의 용서와 함께 죄인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피로서 죄를 씻음을 의미하며,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완전히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와 구속을 동시에 선포하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로 받아 주시며,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삼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한 사람에게, 한 번만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는 누구에게 줄 수 있나요? 세례는 보이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에게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의 믿음과 복종을 고백한 이후에만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교회의 회원과 같은 사람들의 아기들은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늘에서 들려지는 이 말씀은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고백이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고백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중심으로 하여 베풀어진 것이며, 마음의 변화를 나타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은 당시 극도로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일깨워주고, 그들이 몸의 외적 정결 의식으로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 영혼이 깨끗함을 받도록 준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로, 더럽혀진 것을 다시 깨끗하게 만드는 정화의 예식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으실 필요도, 정화되실 필요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우리가 받을 세례를 축복하시기 위해, 세례요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을 낮추시며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세례로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 방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의 사랑은 늘 손익 계산이 분명합니다. 사랑하기에 앞서 항상 어떤 조건과 이유가 충족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할수록 늘 모자라고 목마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이익이나 이유보다, 늘 사랑하는 이가 우선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항상 먼저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의심치 말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세례에 관한 말씀처럼 아무런 손익 계산 없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낮추십니다. 그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 당신 마음에 드는 자녀로 생각하십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어리석어 보이는 이 사랑의 방식이, 예수님을 통해 모두를 채우고도 넘쳐나는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임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생활은 그 사랑을 배우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을 통해 사랑할수록 늘 부족하고 목마른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을 만나, 모두를 채우고도 넘쳐나는 넉넉한 사랑으로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배우는 은총의 자리가 되도록 축복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세례자 요한 앞에 무릎을 꿇으며, 강가에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낮추시며 요한이 베푸는 세례에 기꺼이 응하십니다.

글을 쓰다 우연찮게 본 글을 소개할까 합니다. 약 2,000년 전 인구 5만 명이 살던 폼페이 도시는, 베스비우스 산의 화산 대폭발로 2,0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 있었습니다.

폭발 전, 화산재가 조금씩 뿜어져 나왔다고 합니다. 그 나오는 며칠 동안 노예들과 가난한 시민들은 서둘러 피신을 하여 그들은 무사히 목숨을 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돈과 권력과 명예와 자신들의 저택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대피하지 않았던 그들은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나약한 욕심은 한낱 벌레보다 못함을 새삼 느낍니다.

이처럼 신앙인들의 삶 속에는 때로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한 채, 무겁게 멍에를 짊어지고 가는 분들이 종종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7)”.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습니다. 결국 나 혼자 죽으며,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3가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첫째,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두 번째, 어디서 죽을지 모릅니다. 세 번째,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이재명 윤석열
▲(왼쪽부터) 2일 윤석열 후보가 명성교회에서 기도하는 모습, 이재명 후보가 새에덴교회에서 박수 치는 모습. ⓒ선대위
사람은 태어나는 방법이 비슷하지만, 죽는 것은 천차만별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 신앙인들은 죽음을 늘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그리고 동역자가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돌아갈 본향(집)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세상에는 의지할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만 붙잡고, 주님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만이 예수님의 세례에 참여하는 성도들이며,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길입니다.

권력과 명예와 부귀영화의 끈을 놓지 않았던 어리석은 베스비우스 산의 재앙을 또 다시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을 그리스도 앞에서 낮추고 모든 것을 비워내야 합니다. 사람과 권력을 따라 동분서주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을 따라 향기를 발하는 세례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지도자의 능력과 청렴성과 청빈사상과 애민정신으로 무장한 지도자를 뽑는 안목 있는 세례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거짓말과 말장난으로 국민들을 현혹하는 지도자는 절대 뽑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할 줄 아는 지도자,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는 아모스 예언자의 말처럼, 정의와 공의가 살아 숨 쉬는 정의로운 세례인들과 이 땅 백성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