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십자가 작은 예수 그리스도 풀밭 빛 기도 믿음 소망 사랑
▲ⓒ픽사베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 2:26).

이 세상에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뭉클해지고 행복해집니다. 부모님의 그 사랑에는 이 땅 그 어떤 것보다 좋은 평안과 기쁨, 그리고 용서할 수 있는 너그러움이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우리의 손을 꼭 잡고 있다면 우리는 두려움을 잊고 평안할 수 있으며, 외부로부터의 어떤 침입도 두려움 없이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역시 삶의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슬픔을 뒤로 하고 하나님을 뵈올 때, 그러한 평안을 입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땅에서 하나님 나라로 자리를 옮기셨다는 위치의 이동만으로 볼 것이 아닙니다.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해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 줌으로써 보다 더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게 되었고, 구원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확연히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구원을 향한 참된 소망을 품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본향, 즉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그리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곧 잃어버린 크리스천의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천주교 어느 수녀님의 글이 마음으로 와 닿아 소개하려 합니다.

“나는 더 이상 정의를 외면한 사랑을 신뢰할 수 없다. 양들이 사지로 내몰리고 있는 처절한 상황 앞에서도 눈, 귀, 입을 닫은 목자들을 결코 신뢰할 수 없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직장상사에게 굴욕을 당해본 적도 없고, 자기 방 청소며 자신의 옷 빨래며, 자신이 먹을 밥 한 번 끓여 먹으려 물에 손 한 번 담가본 적이라곤 없는 가톨릭의 추기경, 주교, 사제와 수도자들의 고결하고 영성적인 말씀들이 가슴에 와 닿을 리 없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 보호를 외면하고, 제도교회의 사리사욕에만 몰두하는 목자 아닌 관리자들이 득실거린다. 고급 승용차, 고급 음식, 골프, 성지순례, 해외여행에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부자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 자신이 부자이며 특권층이 되어 버린 그토록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의 모습이 아름다울 리 없다.

주교 문장에 쓰인 멋스런 모토와 그들의 화려한 복장, 가슴 위 빛나는 십자가를 수난과 처참한 죽음의 예수님의 십자가와 도무지 연결시킬 재간이 없다. 나날이 늘어나는 뱃살 걱정이며 지나치게 기름진 그들의 미소와 생존의 싸움에 지쳐 있는 사람들과는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가난을 서원한 수도자들 역시 그리 가난하지 않다. 수도원에서는 아무도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다. 안정된 공간에서 해주는 밥을 얻어먹으면서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한의 대접을 받고 산다.

어딜 가도 ‘수녀님, 수녀님’ 하면서 콩나물 값이라도 깎아주려는 고마운 분들 속에서, 고마운 줄 모르고 덥석 덥석 받는 일에 전문가가 되어간다.

말만 복음을 쏟아 놓았지 몸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며, 아기를 낳아보고 남편 자식 때문에 속 썩어보고 시댁 친정 식구들에게 시달려 보며 인내와 희생을 해본 적이라곤 없는 탓에 철딱서니 없는 과년한 유아들이 없지 않다.

수도복 입었다고 행세할 무엇이 있었던가? 본인이 원해서 하는 독신생활에 자랑할 무엇이 있었던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겸손하게 봉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명하지 않는다면 수도복과 수도생활, 독신생활조차 그 의미가 희석된다.

교구, 본당, 수도회의 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세상 일에 눈을 돌릴 수 없다고 변명하고 책임 회피할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생명이 함부로 훼손되고, 사회적 약자들이 실의와 도탄에 빠진 이 나라 정치 사회의 불의를 향해 단호하게 저항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수도자들이라도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고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종교계가 소름 끼치도록 조용하다. 이것은 무얼 뜻하는 걸까? 나 역시 작은 수녀에 불과하고 비겁하며 합리화하고 회피하고도 싶다.

내가 비판한 사람들 못지않게 비판받을 행동을 하고 있다는 뼈아픈 자의식으로 인해, 차라리 그 모든 것에서 물러나 침묵을 택하고도 싶다. 그러나 시간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는 아모스 예언자의 외침이 내 심장에서 불꽃처럼 뜨겁게 일어서고 있다.”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지금 천주교와 개신교, 불교를 비롯해 모든 종교계가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요? 3.1 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이 누구였습니까? 하지만 지금의 종교 지도자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물론 오늘날 종교계와 한국교회가 많은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개교회 중심으로 세속을 따라 물질만능주의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경건이 중심이 아닌 성공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많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주님을 등에 업고 마치 자신이 주님처럼 행세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교회는 오직 본질에 충실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질에 충실한 교회, 본질을 붙잡는 지도자만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우리 신앙인과 목회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거짓된 신앙인과 목회자가 아니라, 참된 신앙인과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먼저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고 있는지, 목회의 길에 부족한 점이 있지는 않은지 성찰할 수 있는 태도와 자세가 필요합니다.

게다가 물질만능주의적 사고방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철저한 자기 의식개혁과 자기 관리를 위해, ‘영적 현미경’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 수, 교회 크기에만 몰입하다 보면 자연적으로 교만해지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멀어져가면서 세속화에 물들어 이웃을 향한 시선도 점점 멀어져 갑니다. 그러다 끝내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기는 무서운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의 신앙을 병들게 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주님의 심판날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처절한 괴로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19라는 질병으로 인한 탄압이 지속되고 있지만, 목회자와 지도자들은 세속화에 안주하며 적그리스도들의 놀음에 동참하여 그들이 원하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참으로 애가 마릅니다.

오늘 수녀님이 쓴 글에도 적나라하게 나왔듯, 지금 종교 지도자들은 보신주의로 일관했을 뿐, 성도들의 신앙을 위해 그리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 행동하는 것은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신 주님의 준엄한 말씀을 듣고 있는지, 참으로 애가 탑니다.

그리고 매 주일마다 외치는 설교는 어찌 들어야 할지, 차라리 적그리스도들이 즐거워하는 비대면 예배를 계속해서 드려야 하는 것인지요?

말만 초대교회를 앞세우지 말고, 우리 조상과 선배들의 핏값으로 지켜 세워진 교회 앞에 오로지 행동하는 믿음으로 전환하여, 잃어버렸던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아름다운 하나님 복음의 전진기지로 만드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