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 두레마을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남한의 사정은 혼란스럽기 이를 나위 없었습니다. 공산주의를 따르는 좌익 세력과 민주주의를 따르는 우익 세력 간의 다툼은 숱한 피를 흘리며 극한 대립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소련이 1917년 공산혁명을 성공한 이래 유산계급 부르주아 세력을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무산계급의 해방을 주창하였기에, 가난하고 억눌려 살던 사람들에게는 ‘복음’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소련 혁명의 지도자 레닌이 “빛은 동방에서”란 말을 선포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 아래 고통당하고 있는 조선의 해방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터라, 조선의 지식인들과 소작인들에게는 희망의 소리로 들렸습니다.

더욱이나 소련 측에서 중국 상해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금을 3 수레나 보내면서 독립 투쟁에 쓰라고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니 조선의 지식인과 청년들, 그리고 소작인, 하층민들에게 소련과 공산주의는 해방 운동의 고향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거기에다 북한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소련군 소위였던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화 작업이 빈틈없이 진행되었고, 남한에서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의 지도력 아래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승만 박사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불굴의 신념과 탁월한 전략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공산치하에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남한에는 이승만 외에도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 귀국한 김구 선생입니다. 김구 선생의 애국심과 투쟁 경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에게는 이승만 박사에 비하여 약한 점이 있었습니다. 국제 정세에 대한 식견과 공산주의 세력을 견제하며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 필수적인 전략적인 능력이 부족하였습니다.

선생의 높은 이상을 실천함에 필요한 전략과 전술이 약하였습니다. 해방 이후의 극심한 혼란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인 결합은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이 손잡고 함께 나라를 세우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때 만일 이승만 대통령에 김구 부통령이 이루어지고 이승만 이후 김구 선생이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 있었더라면 우리 겨레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지 못한 책임이 어느 쪽에 있었는지, 아니면 양쪽에 다 있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김구 선생의 애국 애족 정신만큼은 지금까지 빛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