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디스커버리
▲오병이어교회 내부 바닥의 모자이크. 지금껏 선명하게 보존되어 있다. ⓒ홍성사 제공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태복음 4:4)”.

예수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십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무척 주리셨습니다. 시험하는 사탄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굶주려 탈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대응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하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실 관문인 첫 번째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많은 약한 자들과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들이 오는 것을 보시고 측은해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하십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물음에 “여기에 온 사람들로 하여금 조금씩 돈을 받게 해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대답합니다.

그 때 제자 중 시몬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가 예수님께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들을 잔디밭에 앉게 하시고, 소년에게서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신 후, 무리들에게 나눠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러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은 ‘오병이어의 기적’은 비신앙인들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떡과 물고기를 먹었던 무리들은 그 제서야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즈음,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요한은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오히려 당신이 내게로 오시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제 허락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요한이 허락합니다.

만물의 주인이시고 왕 중에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계획하신 순리대로 순종하며 따르시는 모습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즐겁고 기쁜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동이 났다고 말할 때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자신의 때가 아니 되었다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신앙인들은 이를 깨달으며 겸손한 마음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과 권력이 있으셨지만 절대로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았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실천하셨습니다. 이는 실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나지막한 속삭임 아닐까요?

그러나 오늘날 교회 중직자나 그들을 따르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주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자신의 뜻을 굽히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고집과 아집 속에 자신을 위한 방법으로 온갖 술수를 사용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감동을 준 그대로라는 엉터리 신앙관으로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판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판단해 봅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그 메시아를 진정 왕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인가?’ 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사실 성경과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표적을 보고 자신들의 배를 채워주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왕으로 세우려 했던 것입니다. 비단 유대인들만 기대한 메시아 상이 아니라, 이 시대 인간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을 향해 섬기는 백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만큼은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원하는 하나님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그 자체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를 따라 하나님을 재창조(?)합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누가복음 22장 19절)”.

예수님의 맨 처음 시험도 떡이었는데, 이 최후의 만찬에서도 떡으로 마무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떡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시는 곧 생명의 말씀’입니다.

영적인 떡, 생명의 떡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지금 배고픈 사람이 떡 한 덩이를 더 바라는 모습을 잘못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배부르게 하는 떡이라 표현되는 인간의 욕망은, 한계가 없어 만족이라는 기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생명의 떡은 현실적으로 배부른 상황을 넘어서는 영적 풍요로움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마음을 가지는 마음에서 나누려는 마음으로 전환할 때, 떡은 우리에게 생명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떡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고, 그 사랑 속에서 당신의 몸과 피를 떡과 포도주로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성찬식 때마다 그 떡과 잔을 받아 마십니다.

하지만 그 떡을 받아먹고 마시는 우리 마음이 눈에 보이는 떡만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 떡의 진정한 생명력을 잃고 말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당연히 육신을 배불릴 수 있는 떡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에만 중점을 두다 보면,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손익계산 속에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삶의 모습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하며 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저 많은 사람들이 먹을 떡을 우리가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주님께서 마땅히 해주시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음을 암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아멘으로 화답하며, 내면 깊은 곳까지 감사와 감동으로 젖어 있어야 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무리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는데, 감사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니 참으로 애가 마릅니다. 물론 떡과 고기를 예수님 앞으로 서슴없이 기부한 그 소년은 아마 장래 주님이 쓰시는 큰 그릇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소년은 아마 부모로부터 대를 이은 참 믿음의 가정에 속해 있지 않을까요? 주님의 말씀에 크나큰 감동이 있었기에, 그 어린 소년은 자신이 먹을 양식을 선뜻 주님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면 은혜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기도가 부족하다고 여기거나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지 않는다는 편협한 신심은, 오히려 이해하지 못할 일을 연이어 겪는 이들에게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지식이 아닐까요?

바라는 대로 다 이뤄지는 신앙생활이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바라는 대로 다 이루어지면 욕심만 더욱더 커지지 않을까요? 바라는 것이 선한 뜻이라도 우리 심령이 위태롭기 그지없는데, 진정 우리를 행복하도록 내버려 두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결핍 속에 하나님 뜻대로 이루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알아보려는 그 마음과,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려 애쓰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득 부어주시는 은혜 가운데 거저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고, 복음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