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관순
많은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자 총독부는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류관순은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고향에서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며 시위를 계획했습니다.
4월 1일, 병천면 아우내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습니다.
시위대의 함성이 커지자 일본군 헌병들은 총검을 휘두르며 진압했습니다.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은 평화시위였음에도 19명의 사망자와
3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때 함께 시위에 참여했던
류관순의 부모님은 헌병대의 총탄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헌병대에 붙잡힌 류관순은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습니다.
투옥 기간 중에도 류관순의 독립 운동은 멈추지 않았고
이듬해에는 3·1운동 1주기를 맞아 옥중 만세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으로 1920년 9월 28일,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흔히 류관순 열사를 생각하면 3·1운동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류관순의 독립 운동은 3월 1일 단 하루가 아닌, 청춘을 바친 투쟁이었습니다.
우리는 애국지사의 희생을 기억하자는 단 하루의 시간도 의미 없이 보내곤 합니다.
그분들의 희생에 비하면 기억 하는 일은 너무나 편한 나라 사랑입니다.
단 하루가 아니라 언제나 기억할 수 있도록
그분들이 걸었던 흔적을 소중히 지키고 가꾸어나가야 하겠습니다.

류중현/사랑의 편지 발행인

*교통문화선교협의회가 지난 1988년부터 지하철 역 승강장에 걸었던 '사랑의 편지'(발행인 류중현 목사)는, 현대인들의 문화의식을 함양하고 이를 통한 인간다운 사회 구현을 위해 시작됐다. 본지는 이 '사랑의 편지'(출처: www.loveletters.kr)를 매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