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3년 8월 18일
본문: 마태복음 6:31-34
설교: 김병삼 목사
제목: 이렇게 믿어라  - 의를 구하여라!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마태복음 6:31-34]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아신다!
오늘 말씀은 지난주의 말씀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염려하지 말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면, 이번 주는 염려하지 않을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31~33절까지의 말씀을 한꺼번에 묶어서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못할까요?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토대로 보면 이방인의 특징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인생에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고민을 하도록 만들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의식주의 문제가 우리 인생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고민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본능적인 욕구를 만족하게 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우리 삶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좀 더 근원적인 것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 근원적인 문제가 바로 믿음의 문제라는 것이죠.
“믿음이란 하나님께 함께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의가 보입니다. 의가 보여야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이는 우리의 상황과 문제가 하나님의 의를 덮어버리고 말죠.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시는 것을 나도 알기 위해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존 베일리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도로 주행 시 조명이 가장 절실한 곳은 분기점이다.”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야 하는 순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란, 성령님을 의지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9-20절의 말씀을 보세요.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우리가 걸음을 멈추면 틀림없이 인도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 우리의 성질, 분노는 늘 후회를 낳습니다. 왜냐하면, 의를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분노는 평정심을 잃은 마음, 염려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며 산다는 것이 우리를 참 불편하게 합니다. 정말 예수를 믿는 것이 힘이 듭니다.
얼마 전 병원에서 내시경 수술을 하고 퇴원을 기다릴 때입니다. 수술을 받은 이유가 바쁜 일정 때문인데 수속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어느 병원이나 마찬가지요.
그때 레지던트 선생님 둘이 들어왔습니다. 퇴원 수속에 대하여 물었더니 아주 냉정하게 “저희는 그런 거 모릅니다. 간호사에게 물어보세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호사실에 그럼 선생님이 이야기해 주세요!”라고 했더니 “그 일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라고 하고는 나가는 겁니다. 그 순간 화가 확 올라왔습니다.
“잠깐 나 좀 봅시다!”
그런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갑니다. 순간 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생각, 그리고 ○○병원에 갈 때마다 설교하면 환자를 생각하고 진료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함께 온 선생님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제가 따지고 들자 집사람이 말리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제 마음속에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목사인 거, 게다가 만나 교회 목사인 것도 알게 될 텐데 화를 내도 되는지, 이것이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 순간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교차합니다.
아내가 저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크리스천이고, 저 사람은 크리스천이 아니잖아!”
그런데 제 마음속에는 이건 크리스천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으로서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마음속에 남는 것은 후회뿐이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특별대우를 받으려는 생각 때문에 화가 났는가?
그렇다고 내가 끝까지 따라가서 잘못을 지적하고 고칠 만한 용기도 없으면서 왜 화를 냈는가? 결국, 참았어야 할 일인데.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인지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순간 제 행동이 굉장히 감정적이었다는 것이죠.
우리 인생의 후회와 비참함은 어떤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반응 때문인 것 같습니다.
결국은 내가 만족을 얻으려는 것이 우리를 그렇게 만족하게 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이기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하는 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식이 있죠.
화부터 내지 말고 좀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옳은 일인지, 하나님 앞에서 집중해 보십시오!
그래서 우리에게 연습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화가 나려는 순간에 마음속에서 “time out!”을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 아니 예수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왜 오늘 말씀이 이렇게 흐르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 중의 하나는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거스른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왜 분노하게 되는 것일까요?
분노는 잘못된 기대감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이 원하는 것, 때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 원치 않는 사건들이 일어날 때, 그리고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그리고 큰 기대를 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내가 하려고 하니까 말입니다.
남편에 대하여 화나는 일도 남편이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을 때죠. 부부간의 관계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모두가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기 때문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 환경, 시간, 그리고 사람들은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죠.
예를 들면 우리는 씨를 뿌리고 물을 줍니다.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가 한 행동에 대하여 기다릴 수 있는 것이 필요한 것이죠.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게 될 때, 예측할 수 없는 감사를 깨닫게 되죠. 바로 33절의 말씀이 그것이죠.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바라며, 기다릴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하나님께서 쓰신 것을 보면 참 신비로운 방법이었습니다.
그의 꿈은 세계 복음화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바쁘게 서두르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움직였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계획보다 훨씬 적게 움직이도록 하셨습니다. 참 많이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옥에서 참 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했고, 갇혀 있는 시간에 편지로 2천 년 동안 전해지는 복음의 진수를 기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사용하시는 방법을 보세요.
그의 장점인 다혈질, 복음 전도자적인 기질을 그냥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게 했던 수치심 가운데서 그의 신앙의 깊이를 만들어 가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의’가 드러날 때, 우리는 문제가 클수록, 더 큰 기적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삶에 고통의 무게가 많을수록, 그것을 거두어 가시는 큰 기쁨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삶에 역경을 통해, 축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삶에 상처는 영광스런 흔적을 만들어 나가게 됩니다.
아, 그런 말씀이구나!
하나님의 의를 먼저 생각하면, 깨닫지 못했던 감사와 기쁨을 경험하게 되는구나!

유영만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역경이 당신의 경력이 되게 하라. 당신의 실패가 오히려 당신의 실력이 되게 하라!”

서영은의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라는 책에, 그녀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깨닫게 된 내용이 나옵니다.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순례자들이 짐을 가볍게 하려고 버리는 것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후자의 것은 아직 쓸모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버려지지만, 버려진 뒤에 쓰레기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결국, 쓰레기가 될 것을 놓고 순례자는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 셈이다.

결국,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고 살아가는 순례자들만이 먼저 인생을 가볍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길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하지만, 결국, 쓰레기가 될 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라는 것이죠.


만족하는 삶이 있다!
몇 주 동안 계속된 말씀을 통해 무엇을 느끼셨나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손길이 믿음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가만히 묵상해 보세요. 참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지금 계신 일에 온전히 집중하여라 내일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로 동요하지 마라 어떠한 어려운 일이 닥쳐도 막상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이다.

염려라는 것이 참 허무한 것이죠.
우리가 염려하므로 내일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염려가 우리 삶에 치명적인 것은 내일을 염려하다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이죠. 오늘의 불만족스러움 때문에 내일까지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죠.
결국, 내일을 염려하는 사람은 평생을 염려하게 될 것이고, 오늘의 부족함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내일도 열심히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중에 참 멋진 말씀이지 않습니까? 가장 크리스천다운 향기를 낼 수 있는 삶이 아닐까요?

[학교 밖 선생님 365]에 보면, ‘샴푸’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비누가 지배하던 욕실에서 샴푸가 한자리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자신만의 전문분야를 확실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그대로 흉내 내서는 내 자리를 갖기 어렸다.
샴푸가 지배하던 욕실에서
린스가 한자리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샴푸의 일을 빼앗지 않고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쓰러뜨려야 내 자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참 많이 안달하고 힘들어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죠. 누군가 나의 자리를 빼앗고, 내가 손해를 볼까 봐 말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보장하는 미래가 있습니다. 성급함과 염려 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죠. 사람들이 얼마나 근시안적입니까?
참 재미있죠?
파리의 명물 에펠탑은 건설 당시 파리 시민들로부터 도시경관을 해친다는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1889년 탑이 완공되자 ‘쓸모없는 철제 괴물’이라고 몰아붙여 해체 위기에 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물로 인정받고 있으며, 전 세계의 관광객이 에펠탑을 보기 위하여 파리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제가 빼쩨르부르그의 에르미따쥐 박물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며 느낀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명작은 오늘을 사는 시대에 맞는 작품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열어가는 작품이었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판단합니다.
크리스천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일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염려하지 않는 우리가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은 내일 일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리라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오늘을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구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우리의 손에 달렸지만,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에 서서 내일 일을 오늘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책에 나오는 예화를 소개해 드립니다.
선교가 거의 불가능한 모슬렘 지역에서 40년간 일해 오신 한 선교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그분이 대답하셨습니다. “제게는 좋은 후원자가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이 약속을 어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선교사님은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나 사막을 걷고 있을 때나 세상 후원자가 다 끊어졌을 때에도 하나님은 이 약속을 지켜 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내일 일 때문에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당신의 내일은 암흑이 가득 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까?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보장된 희망의 초장입니까? 그리스도인에게 내일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믿음이 없으면 내일은 언제나 절망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내일은 언제나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에게만 내일의 복을 약속해 주십니다. 반면 내일의 염려 때문에 오늘을 슬프고 게으르게 살면, 내일의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늘을 기쁘고 의롭게, 그리고 감사하며 사십시오. 하나님이 내일을 축복의 장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과 관계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 내일은 늘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