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요한 기념교회 입구의 ‘박해의 문’. ⓒ성지선교회 제공

백발이 성성하고 기력이 쇠한 노사도가 에베소의 강렬한 태양빛이 쏟아지는 어느 늦여름, 어두침침하고 허름한 지하 예배실에서 힘없이 둘러앉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한 마디 말을 내뱉었다. “서로 사랑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알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7-8, 현대인의 성경).”

체코의 종교개혁자 ‘제롬’의 말에 의하면, 사랑의 사도 요한은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해서 장시간 설교하는 것이 힘들어졌을 때, 가끔씩 나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한 마디씩 권면하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했다고 한다.

그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권면할 때마다 온화한 얼굴로 ‘나의 아들들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반복했는데, 항상 같은 말만 반복해서 하니까 에베소 교인들은 식상한 나머지 이렇게 건의했다고 한다. ‘사도님, 왜 똑같은 말씀만 계속 되풀이하십니까?’ 그때, 노(老)사도는 ‘이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니라’고 말했다.

◈에베소로의 이주

A.D. 190년경 로마의 감독 빅토르(Victor)에게 편지를 보낸 폴리크라테스(Polycrates, 에베소의 감독)와, 교회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에 따르면, 주후 60년대 중반 유대-로마 전쟁 혼란 속에, 세베대의 아들 요한은 에베소로 이주했다고 한다.

사도 요한은 A.D. 60년대 중후반 무렵,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막달라 마리아를 모시고 살다, 유대 땅을 떠나 에베소에 도착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옆에 있던, 세베대의 아들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부탁한다고 말씀하셨다.

▲사도 요한 기념교회 터. ⓒ성지선교회 제공

이에 요한은 마리아를 예루살렘에 있던 자기 집에 모시고 살다가, 바울의 전도여행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소아시아 지방에 흥왕하게 되자, 바울에 이어 에베소 교회를 맡아 목회하던 디모데의 초빙을 받아, 60년대 중후반경 노구의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로 갔다. A.D. 431년에 있었던 에베소 공의회 회의록에 따르면, 요한이 마리아를 위해 집을 한 채 지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A.D. 60년대 중반,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다 실패했다. 이후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에 의해 무서운 박해가 시작되었다. 유대 땅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네로 황제는 제국 내에서 인정받던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유대 반란 진압’이라는 사명을 주어 유대 땅으로 파병했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 장군과 군사들이 이스라엘 땅에 다다랐을 때, 로마에서 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원로원에서 네로를 황제의 자리에서 파직하며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네로는 급히 몸을 피해 숨었지만 조여오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칼로 자신의 목을 잘라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곧바로 유대 반란 진압을 멈추고 급히 로마로 회군, 황제 자살이라는 초유의 사건으로 혼란에 빠진 로마를 안정시키고 자신이 네로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그는 황제로 즉위한 후 ‘유대 반란 진압’이라는 사명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인 티투스(Titus) 장군을 진압군 사령관으로 파병하게 된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숨 쉴 틈 없이 공격해서 곤경에 처하게 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시기 예루살렘에는 기근과 극심한 가난이 찾아왔다. 이때 로마와의 전쟁과 기근 때문에 죽은 사람 수가 110만 명에 이르렀고, 노예로 팔린 17세 미만 아이들도 9만이 넘었다고 한다. 심지어 기근 때문에 자식까지 구워 먹는 반인륜적인 행위까지 자행되었다는데, 계곡에 던져진 시체들을 본 티투스는 “하나님, 이것은 제가 저지른 만행이 아닙니다!”라고 탄식했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도 요한이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에 정착해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스룹바벨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고 유대인 반란군을 진압함으로써 반란은 끝난다. 예수께서 예언하셨던 것처럼, 예루살렘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파괴되었다. 패배의 결과로 유대인은 국가를 잃고 흩어져,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에베소에서의 사역

바울이 A.D. 64년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 때 로마 제국에 다시 체포되어 순교한 직후, 에베소 교회의 목회는 그 동안 바울을 따라 다니며 전도여행에 동참했던 디모데가 맡은 상태였다. 그러나 디모데도 ‘5월 아데미 축제’ 때 모인 열광하는 군중을 향해 말씀을 선포하다 군중이 던진 돌에 맞아 순교하자, 사도 요한이 디모데에 이어 에베소 교회를 맡아 목회하게 된다.

A.D. 91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아들 티투스 황제에 이어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Domitianus)가 즉위했는데, 그는 어느 황제보다 더욱더 기독교를 박해했다.

초대 황제였던 옥타비아누스 이후, 당시 황제들은 죽고 나면 원로원에 의해 신(神)으로 선포되고 있었다. 선정을 베풀고 백성에게 인정받은 황제는 죽은 후 로마 제국을 지키는 수호신들의 목록에 추가되고, 시민들은 신전에서 죽은 황제의 이름으로 향불을 피우며 제국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했다. 그의 아버지와 형 모두 사후에 신격화됐고, 이런 영예는 이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 클라우디우스에게만 주어진 것이었다.

▲도미티아누스 신전. ⓒ성지선교회 제공

이렇듯 보통 황제들이 죽은 후에 신으로 선포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살아있을 때부터 자신을 신으로 선포했다. 본인 이름으로 ‘도미티아누스 신전’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경배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색출해 박해하는 일에 도미티아누스 신전을 이용했다. 병사들을 시켜 무작위로 사람들을 신전으로 데리고 와 도미티아누스 동상 앞에 경배하며 분향하기를 강요했는데, 끌려온 사람이 경배를 하지 않거나 황제 숭배를 거부하면 기독교인이라 단정하여 감옥에 가두고 박해했다고 한다.

에베소에서 사역하던 사도 요한도 도미티아누스 신전 앞을 지나다 로마 군사들에게 연행돼 왔고, 그는 황제의 동상 앞에서 경배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요한은 로마로 연행돼 독배를 마셨으나,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다. 펄펄 끓는 기름 솥에도 던져졌지만 기적적으로 죽음을 면했다. 이에 로마는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밧모섬으로 유배시켜 혹독한 채석장의 중노동을 맛보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요한은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를 기록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측근에 의해 암살당했는데, 요한은 그 후 밧모섬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제자들을 양육하다, A.D. 100년경 95세라는 나이에 주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요한의 시신은 아야술룩 언덕 위에 묻히게 되었고, 4세기에는 무덤이 있던 그 자리에 작은 요한 기념교회가 지어졌다.

그 작은 기념교회가 있던 자리에 6세기 들어 아야 소피아를 건축한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요한 기념교회를 건축했는데,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십자가 형태를 띠고 있다. 안뜰, 현관, 본당, 부속 예배당, 세례장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고, 본당 제단에는 특별히 복음서 저자들을 상징하는 네 개의 기둥과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기둥을 사용했다. 교회 안에는 4세기경 목조로 지은 작은 예배당과 요한의 무덤이 있다. 예전 교회로 사용하였던 목조 건물 안에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사도 요한의 프레스코가 그려져 있다.

◈성서의 교훈

요한계시록 2장에서는 에베소 성도들을 향해 ‘모든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잘 알고 있으며,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은 것과 거짓 사도를 드러낸 것과 주의 이름을 위해 참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잘 알고,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을 칭찬하고 있다. 반면 ‘너의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했다.

요한 사역 당시에는 기독교가 출현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자연히 교리가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유난히 이단 사상과 거짓 교훈, 그리고 그렇게 가르치는 거짓 사도들이 많이 활동했다. 에베소 교회도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다행히 사도 바울이 개척했고 요한이 주로 맡아 목회하던 교회여서 그런지 이단 사상과 거짓 교사들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던 것 같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잘했다고 칭찬했던 것이다.

올바른 신앙과 거짓 신앙을 정확히 연구·분석하여 어떤 신앙이 바른 신앙이며 거짓 신앙인지를 분별하려면,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차갑고 냉철한 머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내 편이고 아닌지를 계속 점검하고 감시해야 했을 것이다.

거짓 신앙을 정확히 분별하는 것도 중요하고 잘했다고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에베소 성도들은 머리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뜨거워야 할 가슴마저 싸늘하게 식어갔던 것이 문제였다.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잃어버리게 된 역사적 사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기독교 박해 때 신앙을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교리 싸움으로 성도 간의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네로 황제는 A.D. 64년부터 기독교 박해를 시작했는데, 이때 에베소 교회 성도는 바울과 신앙을 저버린 일이 있었다(딤후 1:15-18). 이때 트로피무스를 비롯한 70여 명이 순교를 각오하면서 신앙을 버리지 않고 있다가 순교를 당했지만, 일부 성도는 박해의 칼날을 두려워하여 배교하기도 했다.

에베소 교회에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케린투스와 같은 영지주의 이단들의 영향이 그것이었다. 영지주의는 기본적으로 이원론을 주장하여, 물질 세계는 근본적으로 악하고 영적인 모든 것은 선하다고 가르친다. 영지주의에서 파생되어 나온 이단 사상이 니골라당의 가르침이다. 니골라당은 극단적 이원론주의자들로, 영은 선하고 육은 본래 악하다는 전제 하에 악한 육체가 저지르는 모든 행위는 죄일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거룩함과 순수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러한 박해와 이단 사상과의 싸움 가운데, 하나님을 처음 만나고 섬겼던 첫사랑을 잃어버렸다. 아군과 적군을 정확히 구분하여 사랑할 사람은 사랑해야 했지만, 사랑과 긍휼과 자비 없이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만이 번쩍이던 상황이었다.

▲사도 요한의 묘. ⓒ성지선교회 제공

교회는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이 같은 이단을 미워하고 그들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분쟁 속에 자칫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성도 간의 사랑마저 모두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기 쉽다. 교회도 극단적 이원론에 빠져 악한 것과 선한 것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고,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틀린 것을 틀리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조차 틀리다고 생각하여 구별하고 싸워야 할 적으로 인식하는 어리석음을 주의해야 한다.

물론 너무 분명한 신천지나 통일교 같은 사이비 집단과 이단 사상 및 신앙을 분별하고 그것들과 싸워야 할 경우도 있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교회는 크게 중요치 않은 일로 지나치게 소모적 논쟁을 하며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고 있다. 현재 개신교 교단 숫자가 이를 잘 말해준다. 한국 대표적 교단인 장로교만 해도 200여 개가 넘어가는 실정이고, 다른 교단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추정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분열되어 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가장 큰 약점이자 단점이다.

개신교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필자 개인적으로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중심적 신앙, 다르게 말하면 사랑 결핍이라 생각한다. 내 믿음과 내 지식이 가장 정확하고, 또 내가 경험한 것만이 최고라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과 지식, 경험은 전부 수준 미달이라 확신하는 듯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는 계속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도 유대인들은 본인들의 믿음, 유대 공동체 내에서 내려오던 전통만이 진짜라고 100% 확신했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전부 가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이자 메시아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2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나 회심하기 전까지는 여느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던, 예수 믿는 추종자들을 핍박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 그 사람들을 바라볼 때, 우리와 다른 것을 볼 것인지 아니면 같은 것을 볼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렇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과의 공통분모를 먼저 보고, 거기에 집중하여 교제의 실마리를 풀어간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모습을 먼저 보고, 거기에 집중하여 자신과 상대를 비교하고 분리하며 실마리를 헝클어간다.

한국교회는 위 두 가지 경우의 수 중에 굳이 후자를 택하여, 커다란 공통분모는 외면한 채 아주 작은 자신과 다른 부분에 집중하여, 상대와 비교하고 분리하며 나누는 일을 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면 그 결말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현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도 잃고 있다. 사실 형제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 무궁토록 여전히 우리들을 사랑하신다. 하지만 그 사랑은 겸손한 마음과 가난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만이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교회는 겸손한 마음과 가난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많은 물질적인 복을 허락하셨는데, 그 물질적인 복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자연히 형제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정죄와 비난의 칼날을 그들에게 들이미는 것 뿐이다.

한국교회는 ‘욕조의 더러운 물을 버리려다 자칫 욕조에 있는 아기까지 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교회 내 분열의 아픔을 치유하고 분열된 교회를 회복하기 위해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인 요한일서를 기록했는데,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했고 죽을 때까지 에베소 교회에서 사랑의 메시지만을 전했지만, 그때 받은 교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사랑과 순수한 복음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 성도는 지진과 말라리아, 나중에는 투르크인들의 칼날에 스러져 갔다. 소아시아 지역 중심 교회였던 에베소교회는 교회의 기능을 상실하여, 결국 요한계시록의 말씀대로 교회의 촛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지금은 흔적만이 당시의 아픔을 간직한 채 여행객을 맞고 있다.

▲원제연 선교사.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알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7-8, 현대인의 성경).”

이스탄불에서 원제연 선교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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