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목회자와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은혜’라는 말을 쉽게 내뱉곤 합니다. 입버릇처럼, ‘은혜 가운데 잘 되었다’, ‘은혜로 해결해야지’, ‘은혜로 넘어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라는 말은 그렇게 함부로 끼워넣어 말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쉽게 말해 자기가 판단하고 생각하는 일은 은혜롭고, 남이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은혜(恩惠)의 사전적 의미는 ‘사랑으로, 고맙게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으로, 영어로는 ①a blessing ②a boon ③a favor ④grace 등으로 표현됩니다.

히브리어로는 ①헨: 자비함, 즉 주관적인 호의, 은혜,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은총, 은혜(로운), 즐거운, 현숙한, 사랑스러운, ②토브: 넓은 의미에서 선하다(또는 잘되다, 타동사로 선을 행하다, 선하게 하다, 더 낫다(선을 행하여, 선히 여기다) 기쁘게 하다, 선하다(선을 행하다. 선히 여기다) ③라하밈: 죄 사함을 말하는데, 긍휼, 사랑, 호의와 자비, 애정 등의 뜻이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①카리토: 은총을 베풀다, 크게 호의를 가지다, 축복하다 ②카리스: 긍휼, 은혜로운 행위, 선물, 애정 서러운, 기쁨을 주는 것 등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은혜와 관련 있는 가장 보편적 단어는 ‘기쁨’을 의미하는 헬라어 ‘카리스’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카리스’의 의미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용어로 ‘헨’과 ‘허세트’가 있었습니다. ‘헨’은 은총을 뜻하는데, 특히 자격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은총을 의미합니다. ‘허세트’는 ‘인자’나 ‘자비’로 번역되는데, 대체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체결한 언약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처럼 은혜의 본질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고 그분의 명령에 불순종함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이를 실체적 행함으로 보이심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은혜는 바로 ‘주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 중에 멸망받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이는 위대한 선물이며, 그 자체가 무한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을 선물로 받았다 또는 깨달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삶에 철저하게 실천해야 하며,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행동은 말씀의 폄하나 왜곡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께 구하면, 그분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분의 은혜는 우리의 인생을 향한 그분의 마스터플랜(master-plan)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이는 단지 순간의 어려움을 이겨낼 ‘꾀’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고, 우리의 삶에서 거룩하지 못한 부분이 제거되도록 그리스도께서 도와주실 것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은혜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면, 우리는 정말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잘못은, 바로 그분의 은혜에 저항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은혜’는 우리 인생에 있어 이렇게 귀중한 것이기에, 우리는 은혜 받을 방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영어에서는 ‘means of grace’입니다.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청교도들이 많이 사용한 표현이었습니다. 그 방법들은 성경 읽기, 쓰기, 성경 타자 치기, 경건서적 읽기, 예배 등이 해당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행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고, 은혜로서 굳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넘치는 은혜의 삶을 영위할 때, 비로소 감사하는 삶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는 이런 ‘은혜의 진실’을 왜곡해서 사용하는 예가 많습니다. 크나큰 중죄를 짓고도 두루뭉술 넘어가자는 말을 할 때, ‘은혜롭게 넘어가자’고 합니다. 잘못된 일임에도 무조건 아무 말 없이 넘어가는 것을 ‘은혜롭게 잘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성도와 하나님 앞에 먼저 용서를 구하여야 합니다. 그 후 성도들이 용서를 할 때 비로소 은혜의 구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실수로 한 행동과 알면서도 저지르는 죄를 분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수는 당연히 용서해 줘야 합니다. 구약에서도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도피성을 6군데 정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시지 않았습니까? 물론 실수했을 때, 본인은 반드시 사과를 해야 합니다.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할 때 감싸주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위배되거나, 교계와 노회, 총회에서 정한 원칙대로 이행치 않은 채 자기 뜻과 주장만으로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성도들이 떠나가며, 헌금을 마구잡이로 사용한다든지 교회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은 분명한 범법행위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교회와 성도, 그리고 이웃에 큰 상처를 입혔다면, 속히 뉘우칠 ‘골든타임’을 놓쳐선 안될 것입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들을 속히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한 후 교회와 성도들 앞에 정중히 사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잘못이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시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러고는 ‘이제 은혜롭게 해결이 잘 되어서 다행’이라고, ‘하나님께서 마귀 같은 무리들을 이 기회에 제거해 주셨다’고 합니다. 너무나도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이마를 맞댄 채 주의 충실한 일꾼들처럼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 같더니, 처지가 바뀌니 곧바로 저주합니다. 이것이 은혜로운 일일까요? 주님의 사랑일까요?

원로목사, 원로장로, 은퇴 장로들께서는 후배들이 잘못하면 바르게 진언하고, 이후에 대한 염려로 더욱 관심을 갖고, 교회와 성도들의 미래를 위해 조언하고 기도하며, 교회가 바르게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힘 있는 시무장로들의 말에 꼼짝 없이 눈치만 보는 모습들을 바라보면, 정말 주님을 믿는 사람들인지, 그리고 어떻게 저런 분들을 교회 지도자라고 대우를 해 주었는지 가슴이 답답하고 미어질 때가 많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일어난 사건인데도 그냥 묻고 가자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냥 묻어야 할 것이 있고, 용서를 구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어렵게 사시는 분들의 귀한 헌금을 함부로 탕진하고, 헌법에 명시된 것을 묵살하면서 제직들을 현혹해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놓고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이 원로목사, 원로장로, 은퇴 장로 그리고 시무장로들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과감히 하나님과 성도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 후에 성도들이 감싸주며 용서해 주는 것이 도리요 순서가 아닐까요?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서로가 노력하고 함께 힘을 모아, 교회 부흥을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하자고 한 마음으로 품는 것이야말로 ‘은혜’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여! 제발, ‘은혜’라는 말을 제대로 알고 판단하여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이효준 장로(부산 덕천교회,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