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에 창설된 국립 중산대학은 광둥성 최고의 대학이다. 1888년 창립된 기독교 대학인 영남대학을 1952년에 흡수·합병했다.

광저우에서 근대사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주강 북서쪽에 있는 사면(沙面)이다. 그곳은 서구 열강들의 배타적 조차지로서, 서양의 고딕식 옛 건물들과 큰 나무숲이 즐비하게 있다.

주강 남쪽 하남(河南)에도 오래된 건물들이 남은 곳이 있다. 강락촌 중산대학이다. 강락촌 캠퍼스에 들어가면, 낡았지만 웅장한 건물과 오래된 나무숲이 역사를 말해준다. 일찍이 중국 전문가로 유명한 미국의 역사학자는, 이곳을 “중국 기독교 고등교육사(史)의 랜드마크이며 현재와 과거가 만나는 저수지”라고 묘사했다.

중산대학은 현재 광둥성의 최고 명문대학으로 5만 명의 학부 및 석박사 학생과 3,500명의 교직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121개 전공을 갖춘 중국의 6대 종합대학이다. 한국 유학생들에게는 친숙한 곳이고, 이 학교 남문 쪽에 원단 도매시장이 있어 의류 사업을 하는 교민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곳에 원래 기독교 대학인 영남(岭南)대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격치서원은 1888년 광저우에 설립된 기독교 대학으로, 후에 영남대학으로 이름을 바꾼다.

고등교육의 선구자인 해퍼 목사

영남대학은 1888년에 설립된 격치서원(格致书院)을 모태로 한다. 격치서원은 고등교육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북미장로회 해퍼 목사의 선구적이고 도전적인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 당시 광저우에는 근대적인 고등교육기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시험 준비를 하는 중국식 학당이 주를 이루었고, 교육 프로그램은 서구식이 아니라 중국 전통 학문이었다. 서양 근대식 학교는 교육 선교의 일환으로 서구 선교사들이 주도했다. 그러나 아직 초·중등 과정이었고, 형편이 어려운 하층민 자녀들이 대상이었다.

해퍼 목사(Andrew P. Happer, 1818-1894)는 1844년 중국에 온, 북미장로회 초기 선교사였다. 그는 18세 되던 1835년에 제퍼슨대학을 졸업해서 5년간 교편을 잡았다. 선교사가 되기 위해 1843년에 웨스턴신학대학교를, 1844년에  펜실베니아 의대를 졸업한 후 중국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교육자, 목회자, 의사 등 전천후 사역을 할 준비를 갖춘 선교사였다. 그는 다섯 개 도시가 개항된 직후인 1844년, 북미장로회가 광저우에 파견한 세 명의 선교사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중국 관리들과 중국인들은 그가 광저우에 거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해퍼 목사는 홍콩으로 가서 모리슨교육협회에서 활동했고, 동료 2명은 닝보로 가버렸다. 해퍼 목사는 중국 남부에 남은 유일한 선교사가 되었다.

선교 여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해퍼 목사는, 광저우 사람들이 교육과 의료서비스를 반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8년제 기숙학교를 운영하는 한편, 진료소도 설치했다. 기숙학교는 1853년에 최초 11명의 졸업생을 냈으며, 1855년도 입학생이 100명 정도였다. 1866년에는 147명으로 늘었다. 또 1847년에 진료소를 설립해 1854년까지 매년 5천명을 진료했다. 기숙학교 운영과 목회 활동의 격무로, 진료소는 이후에 온 켈 선교사에게 이관시켜야 했다.

제2차 아편전쟁 직후부터 선교 환경이 크게 호전되었다. 파견 선교사도 신자들도 늘었다. 1862년에는 북미장로회 광둥성 최초 교회를 광저우에 설립했다. 1864년에 그는 시내에 기숙형 주일학교를 설립했고, 사역자·교사 및 신앙서적 행상인을 키울 훈련학교도 세웠다.

이 훈련학교를 운영하면서 그는 중국 남부 지역 선교에 국한된 교육 사업이 아니라, 중국의 기독교 리더를 키우는 상류층 대상의 서구식 교육 기구, 즉 기독교 대학 설립을 생각했다. 1870년대 말, 그는 북미장로회 본부에 자신의 비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북미장로회 해외선교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용 대비 선교 효과가 낮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해퍼 목사는 스스로 미국에 가서 설립 자금으로 60만 달러를 모았다. 뉴욕대학 산하에 특정 교파에 소속되지 않은 이사회를 구성했다. 북미장로회 본부와는 공식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영향력 있는 다수의 장로교 교인들은 지원 펀드와 이사회에 참여했다.

▲격치서원을 설립한 해퍼 목사는 북미장로회가 파견한 초기 선교사로, 50년 동안 중국에서 사역했다.

기독교 대학인 영남대학

대학 설립 방침은 결정되었으나, 두 가지 쟁점이 남았다. 대학 위치와 언어에 대한 것이었다. 해퍼 목사는 중국의 미래 지도자를 위한 대학을 기대했으므로 중국의 중부, 즉 상하이에 설립할 생각을 했다. 그런데 4백 명 이상의 광둥성 유력 인사들이 광저우에 격치서원을 설립해 줄 것을 연대 서명해서 요청해 왔다. ‘중국 기독교 선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라면서 크게 감동을 받은 해퍼와 뉴욕 이사회는, 영구 교지를 광저우에 두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영구 교지는 해퍼 목사의 생전에는 결정되지 못했다. 영구 교지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설립 15년 뒤인 1903년에 현재 중산대학 강락촌 캠퍼스로 결정되었다.

해퍼 목사가 중시했던 또 하나는 언어였다. 해퍼는 대학 교육의 일차 언어를 영어로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언어 선택을 중국어로 하면 대학의 최종 목적이 협소해질 것을 우려했다. 즉, 대학 교육을 중국어로 하게 되면 서양 교육 선교사들이 학생들을 사역의 조력자로서만 육성하는 데 그칠 것이나, 영어로 하는 교육은 학생들에게 복음을 제대로 이해시키고 현대 과학기술을 잘 가르치는 데 유리할 것이라 생각했다.

또 광둥어가 아니라 표준어인 북경어를 강조했다. 그는 중국의 미래 지도자는 지역 언어가 아니라 세계 시민의 언어인 영어와 북경어를 구사해야 한다고 믿었다. 실제 대학 내에서 영어로 수업하면서, 영남대학은 국제화된 대학으로의 기초를 이루었다.

영남대학의 시초인 격치서원은 1888년 3월 28일에 개학했다. 80명이 응시해 30명이 합격했고, 다음해는 100명이 신청해서 65명이 입학했다. 초기 기독교 학교는 대부분 어려운 계층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격치서원 학생들은 상류층 자녀들이었다. 과정은 성경, 영문, 지리, 수학, 물리, 화학, 동물, 식물, 생리학 및 체조 등이었다. 격치서원은 매일 아침에 일어나 체조를 한 후 아침을 먹고 예배를 드렸다.

▲영남대학 시절, 미국인 교수들과 수업하는 모습. 영남대학은 영어로 수업을 했으며, 학생 자치회 활동이 활발했다.

영남대학의 변천

해퍼 목사는 격무와 과로로 1891년 미국으로 돌아간 지 3년 후에 순교했다. 해퍼 목사 순교 후 학교는 정지되었다. 그러자 노예스 목사의 배영학교가 1893년부터 1898년까지 교내 신학원 과정과 격치서원을 합병해서 운영했다. 1898년 격치서원은 다시 배영학교에서 분리되고, 1899년 위스너(Oscar F. Wisner) 목사가 광저우에 온 다음 재건되었다.

격치서원은 배영학교와 결별하고 지금의 해방중로에 있는 복음당에 학교를 정하고 교무와 한문반 총감독자로 종영광 교수를 초빙했다. 종영광(钟荣光: 1866-1942) 교수는 영남대학 최초의 중국인 학장이었다. 종 교수는 격치서원에서 조교로 가르치면서 영어와 서양의 근대학문을 배웠다. 처음 시작할 때는 교사 3명과 학생 17명이었다. 1900년 의화단사건으로 잠시 학교를 마카오로 옮겼다가 1903년에 영남학당(Canton Christian College)으로 개칭하였다. 1904년 광저우로 돌아와 지금의 중산대학인 강락촌(康乐村)에 부지를 사서 건물을 지었다.

1906년에는 중국 최초로 남녀가 수업을 같이 듣는 대학교로 허가를 받기도 했다. 1924년 교육권 회수 문제가 제기되면서 중국인 자치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26년 11월 사립학교 규정이 발표되고, 대학의 자치권은 반드시 중국인이 맡아야 하며 외국인이 대학을 설립할 수 없다는 내용이 명문화되었다. 1927년 이사회 초대 의장은 손중산 선생의 아들인 손과(孙科)가 맡았고, 1899년 이래로 교무를 맡아왔던 종영광 교수가 중국인 최초의 학장으로 임명되고, 학교 이름도 영남대학(Lingnan University)으로 바뀌었다.

▲영남대학이라 적혀 있는 북쪽 교문 모습. 영남대학은 중국의 근대 고등 교육을 주도했다.

영남대학은 1888년 해퍼 목사를 시작으로 해서 1924년 제임스 헨리 학장을 끝으로 외국인 학장 시대는 마감되고, 1927년부터 중국인 학장으로 대체되었다. 1930년대 들어 박제의원 부설 남화의학원과 여자의대였던 헤켓여자의대가 영남대학에 합병되었다. 중일전쟁이 끝난 1940년대, 백학동에 있던 협화신학원도 영남대학으로 편입되었다가 1951년 다시 분리되었다. 1952년 영남대학교는 문리과대학과 의과대학으로 분해되고 사라졌다. 전자는 중산대학으로, 후자는 화남의학원으로 합병되었다. 화남의학원은 곧 중산의학원으로 개명했다.

한편 신해혁명을 이끌었던 손중산 선생은 광저우 지역에 근대식 대학 시설이 필요하다고 느껴 1924년 국립광둥고등사범학교, 광둥공립법과대학, 광동공립농업전문학교를 합병해 국립 광둥대학을 오산로(五山路)에 설립했다. 1920년대에 이 학교들은 청말 근대화의 흐름속에 탄생했으나, 영남대학에 비해 종합대학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전문학교에 머물고 있었다.

손중산 선생 별세 후 1926년 학교는 국립 중산대학으로 개명되었다가, 신중국의 성립 직후인 1952년 고등 교육 조정 과정에서 영남대학과 합병되고, 영남대학이 있는 강락촌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대학의 정통성은 미국 기독교 학교가 아닌 중국 정부가 설립한 대학에서 찾되, 대학의 인프라는 영남대학의 것으로 대체한 중국식 실용주의가 엿보인다. 지금 중산대 배지에 나오는 1924년이라는 연도는, 손중산 선생이 중산대학의 전신인 국립광둥대학을 설립한 연도이다. 중산대학은 1952년 영남대학을 흡수한 이후, 2001년도에 중산의과대학까지 합병했다.

동상이몽

영남대학 이름의 변천을 보면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대학명은 영어 명칭과 중국어 명칭이 일치한다. 그러나 영남대학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1888년 설립할 때 중국어 명칭은 “격치서원(格致书院)”이고, 영어 명칭은 “Christian College in China(CCC)”이었다. 격치서원의 “격치”는 4서 중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온 말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어 지식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요즘 말로는 “기술 혹은 과학”으로 해석된다.

▲영남대학은 1903년 현 강락촌에 영구 교지를 확보했다. 1930년대 전성기에는 200여 채의 서구식 건물들이 들어선 교육단지였다고 한다.

굳이 쉽게 풀어보면 중국어 명칭은 ‘과기대’이고, 영어 명칭은 ‘중국 기독교 대학’ 정도였다. 대학교 설립을 두고 해퍼 등 미국인들은 중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대학을 생각했고, 중국인은 과거제도에 없는 서양의 과학을 배우는 곳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최고 학부의 설립을 두고, 창립 주체인 미국 뉴욕 대학의 이사회와 대학을 유치하는 광둥인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했다.

격치서원은 1900년 영남학당, 1912년 영남학교, 1918년 영남대학, 1927년 사립영남대학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영어 명칭은 1903년 ‘광저우 기독교 대학(Canton Christian College)’으로 바뀌었다. 뉴욕 이사회는 기독교는 유지하되 지역명만 중국에서 광저우로 축소하는 데 동의했지만, 1927년에 소유권을 중국에 넘길 때까지 영남대학이 기독교 대학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27년부터 영남대학이 중산대학으로 흡수된 1952년까지 영어 명칭과 중국어 명칭이 영남대학(Lingnan University)으로 비로소 일치되었다.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