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9월 7일
본문: 열왕기하 22:2, 23:21~25
설교: 김병삼(만나교회 담임)
제목: 개혁!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열왕기하 22장 2절 / 열왕기하 23장 21~25절]

2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21.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22.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2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압니다. 그러나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할 것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만 잘 살면 됩니다.
[광수생각]에 참 멋진 글이 있더군요.
눈을 뜨면 새날이다.
하루하루가 새날이지 않은 날이 없다.
그러니 오늘 내가 하는 사랑은 첫사랑이다.
그러니 오늘 내가 하는 일은 나의 첫 일이다.

사람들은 매일 반복된다고 생각하니까 지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단 하루도 새날이지 않은 날이 없다.

사막을 알기 위해 세상의 모든 사막을 다닐 필요는 없다. 단 하나의 사막이라도 모래바람을 뚫고 끝까지 다녀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생선의 맛을 알기 위해 세상의 모든 생선을 다 먹어볼 필요는 없다.
단 하나의 생선이라도 머리부터 뼈까지 남김없이 먹어 봤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진정한 사랑을 알기 위해 세상의 모든 사람과 마주할 이유는 없다.
단 한 사람과의 사랑이어도 뼛속까지 사무치는 것이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정직하게…
본문은 요시야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시야는 여덟 살에 왕이 되어 31년간 남왕국 유다를 다스린 16대 왕입니다. 성경은 요시야에 대해 아주 긍정적인 말로 칭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왕들을 생각한다면 참 이례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니까,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라고 말씀하는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극찬을 받게 했을까요?
열왕기하 22장 2절을 보십시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한 단어로 정리하라면 ‘정직’입니다.
우리가 오늘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 정직이고, 요시야가 ‘왜’ 정직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죠.
“He did what was right in the eyes of the Lord.”
메시지 성경에서는,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았다. 그의 조상 다윗이 밝히 보여준 길을 똑바로 따라갔고,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표현합니다.

정직은 하나님의 눈에 옳은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직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 눈에 옳은 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4월 우리는 참 마음 아픈 사건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정말 힘들었던 것은 그 사건을 두고,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을 SNS를 통해 퍼 나르기 시작하며 많은 사람이 참 힘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누군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분노를 돌릴 방법이 없기에 모든 사람이 화를 분출할 출구를 찾는 듯 보이기도 했습니다.
차가운 물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생각할 때 힘들었을 부모의 마음, 구조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차가운 물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남편이요 아버지인데.
선박의 주인도 일을 해결해야 하는 정부도 힘들어하는 가족들도, 그것을 지켜보는 가족들도 오로지 “자신의 눈에 옳은 대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똑같은 사실을 두고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요시야를 “정직히 행했다”고 평가하는데,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읽지 않았지만, 열왕기하 22장 전체를 보면 요시야가 왕이 된 지 18년이 되던 해에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책을 서기관 사반으로부터 전해 받고 읽게 됩니다.
열왕기하 22장 11절에 보면, 요시야는 그 율법의 말씀을 들으며 옷을 찢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로 하나님을 격노하게 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땅히 행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정직은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직하지 못한 것은 그것을 행하므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불이익 때문은 아닐까요?
그가 알고 있었던 사람들, 그의 조상들이 하던 일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큰 모험입니까?
그는 이제 하나님 이외의 모든 거짓 신의 상을 찍어내 버렸고, 그 우상에 대한 제사와 그것에 관련된 관행을 금하였습니다. 무당, 점쟁이 같은 부류들을 폐하였고 그것들을 위한 산당과 제산들을 헐어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와 온갖 거짓 신들을 위하여 만든 그릇들을 하나님이 성전에서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게 했습니다(왕하 23:4~6).

요시야에게 아주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대로 했다는 것이죠. 왕하 23장 21~23절입니다.
“21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22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2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그들에게 역사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부활절 세월호 참사 와중에 참 힘든 예배를 드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죠.
“이렇게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우리의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때는 우리가 믿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미국 어느 교회에 토네이도가 덮쳤습니다. 교인들과 딸을 잃은 목사님이 그런 상황에서 부활절 설교를 해야 했을 때 한 말입니다.

유월절을 지키라는 것은 단순한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기억을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 됨”을 기억하는 것!
우리의 삶에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때로 낡은 듯 보이고, 형식적인 것 같아도 우리 믿음의 기억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서 자기 믿음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죠. 열왕기하 23장 22절입니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믿음의 중심을 잃어버리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울이나 시소를 생각해 보세요. 어느 쪽이 무거우냐에 따라 기울지 않습니까?
하지만 중심을 잡고 있는 지지대가 어떤 무게도 지탱할 힘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로 양쪽 무게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요시야가 하나님의 율법을 발견하고 읽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는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이죠.


개혁자 요시야! - 말씀으로…
요시야의 개혁은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났던 종교개혁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중세 교회가 성경을 잃어버리면서 타락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중세교회처럼 교회가 번성했던 때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번성한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로마 천주교회는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뿐 아니라 성경책을 소유하는 것조차 금지시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계셔야 할 자리에 성모 마리아, 사도들의 그림과 동상 그리고 숱한 성자들의 형상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유럽 교회를 가면 성당마다 그 마을을 지키는 성자들이 있고, 그 성자들의 기일을 지키며 축제를 엽니다. 바알과 아세라만이 우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씀이 없는 곳에서 버젓이 면죄부를 팔고,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그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얼마나 타락하는지 말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도 기도해 준다면서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해 판단을 내려주는 우상들이 여기저기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단은 단순히 조금 벗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우상숭배의 일종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교주들로 채워져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을 왜 비난합니까?
교회가 너무 커지면서 교회 가운데 계셔야 할 하나님의 자리를 누군가 차지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사람이 가로채는 것이 우상숭배가 아닐까요?
감추는 게 있으면, 말씀 앞에 서는 것이 두려운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온갖 우상숭배에 빠졌다는 것이 우습지 않습니까? 말씀이 사라진 교회에서 권력이 우상이 되어 버렸고 돈이 우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권력을 쥔 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었을 때, 성경을 번역하므로 개혁이 일어났던 것처럼.

요시야는 잃어버린 율법을 발견하므로 종교개혁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유일한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이 없이 우리가 개혁을 한다면 또 하나의 비진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요?

지난 4월 국민일보 시론에 제가 보낸 글이 있습니다.

진실은 없다!
세월호로 이렇게 많은 진실이 난무하던 때가 없었던 듯하다. SNS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대개가 이런 말로 시작한다. “이건 진실인데요.”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진 진실이 너무 많다는 것이고. 너무 많은 진실로 진실은 실종되어버렸다.
2001년 8월에 개봉되었던 영화 ‘메멘토’는 반전을 거듭하는 스릴러 영화다. 전직 수사관이었던 주인공 레너드는 기억을 잃었다.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되던 날의 충격으로 10분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된 것이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아내가 살해당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아는 한 범인은 존 G.라는 인물이 다다.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영화가 말하는 것은 진실은 없다는 것이다.
“기억이란, 이성에 기반을 두어 기록되는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감성이 있기에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믿게 된다.”
객관적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주관이 진실을 만들 뿐이다.
스켑틱스(skeptics)라는 분야가 있다. 이 학문은 무언가를 맹신하는 사람들의 심리적인 면을 연구하며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을 발견한다. 속이는 사람의 마음과 속는 사람의 마음에 같은 요인이 있는데 ‘wishful thinking’(무엇인가를 기대하거나 바라는 생각)이다. 진실을 믿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 한다.

보고 싶은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지난 두 주간 온 국민이 슬펐고 우울했다. 생때같은 자식들의 죽음 앞에서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시간이 흐르며 간절함은 상황은 어떠하든지 꼭 살아와야 한다는 소원으로 변했고, 변해버린 분노는 누군가를 제물 삼아 보상을 받으려는 듯 보였다.
진실을 모른 것인지 감추는 것인지 모르지만, 부정확한 정보는 마치 국민들로 하여금 믿고 싶은 것만 믿으라고 강요하는 듯했다.
수없이 떠도는 괴담들로 같은 사건을 보고 이렇게 다르게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까지 했다. 문제의 심각성은 자신이 믿는 진실과 다르면 다른 진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온 국민이 정의의 칼을 뽑아들었다. 진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거짓이 만들어졌고 온 나라는 서로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진실 때문에 우리는 불행한 나라의 백성을 넘어 미개한 백성이 되어 버렸다. 정의로운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 땅에는 불의한 사람들이 많아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불의’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내려졌다. “불의는 잘못된 ‘사실’(fact)이 아니라 나와 생각이 다른 것이다!”

진실은 무엇인가?
세월호의 참사를 바라보며 누구 편을 들거나 누가 옳다고 말하려는 것이 진실은 아닌듯하다. 이번 사건이 두려운 것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진실이 실종되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2천 전 예수께서는 유대 땅에서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들을 향해 채찍을 드셨다는 것이다. 가장 정의롭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 같다는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예수님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진실을 주장해도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것은 ‘독선’이고 ‘위선’이다.
사람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께 데리고 왔다. 죄인을 죽이는 것이 옳은지 살리는 것이 옳은 지. 정의를 주장하면 사랑이 실종되고, 사랑을 주장하면 정의가 실종되는 순간이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은 정의를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돌을 든 자들에게 너희는 정의로우냐고 물으신 것이다. 스스로 외쳤던 정의가 부끄럽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은 비로소 돌을 놓았다. 평화가 찾아왔고 용서가 베풀어졌다. 진실은 없다! 그것만이 진실이다!

기준이 없는 진실은 주장할수록 사라지는 것입니다.
기준이 없는 정의는 또 다른 형태의 불의를 생산할 뿐입니다.
 
열왕기하 22장 11절에 보면,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라고 하였는데, 옷을 찢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옷을 찢는 것은 “살을 찢는” 것을 대신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표현할 때 옷을 찢어 고통을 나누기도 합니다.


말씀을 이룬다!
오늘 본문 23장 24절에 보면,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이룬다”는 말씀을 영어 성경 NIV에서는 “…to fulfill the requirements of the law written in the book that Hilkiah the priest had discovered in the temple of the Lord”라고 하였고,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Josiah did this in obedience to the words of God's Revelation written in the book that Hilkiah the priest found in the Temple of God”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이룬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결국, 요시야가 하나님께 칭찬받았던 이유가 말씀을 이루려는 노력에 있지 않았을까요?
요시야가 하나님께 이런 칭찬을 받았지만, 정치적인 면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한 사람입니다. 마치 다윗이 그의 인생에 치명적인 실수를 했던 것처럼 말이죠.
요시야는 참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열왕기하 23장 29절을 보면,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라고 말씀합니다.
므깃도는 애굽과 근동지방 사이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그곳에서 수많은 싸움이 있었습니다. 왜 요시야가 굳이 애굽을 막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애굽과 앗수르가 싸우도록 놔뒀더라면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자존심으로 말미암아 정치 외교적 도외시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확실합니다. 열왕기하 23장 25절 말씀입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하나님은 요시야의 완전함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쓴 모습을 보셨습니다. 40여 년간 유다를 통치하며 우상을 숭배했던 그의 할아버지 므낫세의 악행을 다 뒤집기에는 요시야가 통치한 시간이 역부족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시야가 죽고 난 다음 또 왕이 된 여호아하스 역시 다시 우상숭배로 돌아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다는 멸망하고 맙니다. 그렇게 어둡고 탁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노력했던 한 사람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이런 악행과 우상숭배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랫동안 사라졌던 시대에 그 말씀을 가지고 다시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영국 사람들이 홍콩을 지배하며 줄 서는 것을 가르치는데 100년 이 걸렸다고 했는데. 우상 숭배의 습성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에 이야기했지만,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아들과 손자까지도 모두가 악행을 행했습니다. 우리가 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두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죠.
세상이 모두 이런데 나 혼자 선함을 지킨다는 것은 왠지 바보같이 느껴지는 것이죠.

제가 군대에서 훈련을 받던 시절, 예비군 훈련에 참여했던 시절을 기억합니다.
제복을 입혀 놓으면 사람들은 인격을 상실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옷을 입은 사람들의 집단적 행동이 사람들을 무섭게 바꿔놓습니다.
히틀러 아래 있었던 나치가 개인적으로 볼 때 그렇게 잔혹한 사람들이었겠습니까?
군복을 입고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그렇게 살인자들이겠습니까?
제가 군에 있을 때, 군인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군인”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모두가 그렇게 해도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절망과 캄캄한 어둠인 것 같지만, 작은 빛이 되어 이어져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의하며 39세의 젊은 나이에 개혁운동을 주도하다 전쟁에서 죽은 요시야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앞, 뒤의 캄캄한 타락 가운데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이제는 벌써 시간이 지나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시죠. 그 엄청난 사고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 초라해지고 비참해졌습니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때문에 서로를 비난했고, 우리 정부와 온갖 비리로 연결된 시스템을 보면서 이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정부를 욕하며 대한민국 정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졸렬한 정부가 되었고,
우리 국민은 서로를 비난하며 서로가 미개한 국민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페북에 그런 글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민족을 보십시오! 한 번도 위기가 아니었던 때가 있습니까? 우리 지도자 중에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세월호와 같은 사고가 없었던 때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못되고 미래가 없다고 헐뜯었던 우리의 아이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고의 현장에서 가장 용감했던 것이 우리 아이들이었고, 우리 민족의 역사는 못된 인간들 때문에 망가진 것이 아니라, 한 줄기 빛과 같았던 소수의 사람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곳에 모세가 세상을 떠난 느보산이 있고 거기에서 좀 떨어진 곳에 마다바(Madaba)라는 곳이 있습니다. 마다바에 6세기에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 소속 성당이 하나 있습니다. 그 성당 바닥에 모자이크로 된 이스라엘 지도가 하나 있습니다.
그 지도에는 사해로 들어가는 푸른 강이 보이는데 한 물고기는 사해 쪽으로 향하고 있고, 다른 한 물고기는 반대로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사해로 들어갔다가 사해에서 살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는 물고기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물이 요단강이 사해로 흘러들어 가는데 그 물고기는 사해로 휩쓸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물 위에 뛰어올라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 물고기는 사해로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물고기 모자이크는 지금도 그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 ‘사해로 휩쓸려 들어가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시야는 이 물고기 같은 사람입니다.

힐기야에 의해 발견된 율법, 그리고 요시야가 그 율법에 순종하려고 노력했기에, 그 율법은 살아서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도 포로생활 가운데 다시 말씀 앞에 돌아오게 합니다. 예레미야와 에스라 시대에 성전은 다시 건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포로 생활 가운데서도 메시아를 기다리며 인내하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말씀을 지켰던 사람 때문에 말입니다.

요시야가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입니까?
유다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든 그가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섰다는 것입니다.
좌로 가거나 우로 가는 사람 때문에 그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상대방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회개하고, 그가 먼저 옷을 찢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깊이 성찰하고 믿음으로 결단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때인 듯합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우리에게는 요단강도 있고 사해도 있습니다. 내가 그 도도한 흐름 가운데 있는 물고기라면 어디를 향해 가야 할까요?
물살을 거스르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를 포기한다면 누구도 세상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물살을 거스르는 송어나 연어를 봅니다. 참 힘이 들지만, 함께 떼를 지어 올라갑니다.
오늘 말씀을 마감하며 그런 꿈을 꿉니다.
깨끗한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생명 말입니다. 힘들지만, 서로 격려하며 끝없이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 서로에게 기대를 할 수 있습니다.
실망보다는 기대가 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 이 세상에 속하여 있으나 하늘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진정 radical 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