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1. 첫사랑의 신비(아 1:1-7)

솔로몬의 아가라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아가서 1장 첫 본문은 첫사랑(구애 단계)의 기쁨을 잘 표현하고 있다. 특별히 술람미 여인의 사랑 고백(아 1:2-7)이 담겨 있다. 술람미 여인의 사랑 고백에 담긴 아름다운 교훈을 살펴 보자.

1) 첫사랑은 갈망에서 온다(1-2절)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목마름, 곧 희구에서 시작된다. 단순한 목마름이 아니다. 행동적 갈망이 있다. 만남의 갈망이나 입맞춤의 갈망과 같은 육체적 갈망, 부부나 부모와 자식, 연인 간에도 갈망이 있다. 신앙적 목마름도 비슷하다. 믿음이 생기면 신앙적 갈망이 생겨난다. 교회에 대한 갈망, 하나님에 대한 갈망, 말씀에 대한 갈망, 기도에 대한 갈망, 신앙적 뜨거운 갈망이 생겨난다. 혹시 그런 타는 목마름이 있는가? 전도자, 선교사들은 예수를 전하고 싶은 갈망이 남보다 조금 더 뜨거운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갈망함을 받고 사랑을 받는다. 하나님도 사랑의 갈망으로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은 사람도 당연히 행복한 갈망을 품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2) 첫사랑은 칭찬에서 시작된다(2-3절)

솔로몬의 사랑은 값진 포도주보다 낫다. 술람미 여인은 인생의 행복과 기쁨을 상징하는 포도주보다 솔로몬의 사랑이 더 귀하다고 칭찬하며 노래한다. 여기서 사랑은 히브리어 dodim(dod의 복수형)으로, 아가서에 30회 이상 나오는 단어이다. 본래 이는 ‘끓이다’라는 단어에서 온 말로, 술람미 여인을 향한 솔로몬의 갈망이 큼을 말한다. ‘네 기름이 향기롭고 아름답다’고, 값진 기름처럼 향기롭고 아름답게 다가오는 연인을 칭찬한다.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다’고, 칭찬과 존중을 담아 인격적 칭찬의 고백을 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이 모든 처녀들의 선망의 대상인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극찬한다. 누가 이런 찬사를 거절하겠는가. 여러분도 한번 남편과 아내를 ‘당신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땅 최고의 선물’이라고 칭찬해 보라! 창조주 하나님께 사랑받아 하나님께 이런 칭찬을 받는 이는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3) 사랑은 기쁨이다(4절)

솔로몬은 침궁으로 술람미 여인을 끌어들인다. 침궁은 아주 내밀한 개인적 장소이다. 사랑에는 내밀한 기쁨이 있다. 사랑하면 사랑의 은밀한 고백, 은밀한 인도, 은밀히 함께함이 모두 기쁨이 된다. 그리고 그 기쁨은 입술의 노래로 태어난다. 사랑의 기쁨은 기쁨의 노래가 따르는 강한 정서로 승화되어 울려 퍼진다. 예수 믿는 믿음에 이런 내밀한 기쁨이 있음을 아는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이 모르는 내밀한 사랑의 기쁨과 노래가 샘솟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알고 목사가 되려 했던 천문학자 케플러는 기쁨에 대해 이렇게 외쳤다. ‘기쁨은 인생에 요소이며 인생의 욕구이며, 인생의 힘이며 인생의 가치이다. 인간은 누구나 기쁨에 대한 욕구를 갖고 기쁨을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사랑하는 가정에서, 사랑하는 친구들 안에서 사랑의 기쁨을 누려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세상이 주는 기쁨과 다른 더욱 큰 기쁨을 누리고 느껴 보라!

4) 사랑하면 자신감이 생긴다(5-6절)

자신감은 자존감에서 온다. 술람미 여인의 피부가 조금 그을려도 괜찮다. 모든 것이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서정주 시 ‘눈 오는 날’ 중에서!). 왕의 여인임에도 일하는 여인 술람미를 보라! 일하는 여인이 자신감 넘치고 사랑받는다. 사랑하면 가정, 직장, 교회, 하나님의 일에 자심감과 열심이 넘쳐나고 범사에 사랑받는다.

5) 사랑은 표현과 관심이다(7절)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그대여’라고 씩씩하게 외쳐라! 참된 영혼의 중심으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라. 에릭 프롬은 자신의 유명한 책 「사랑의 예술」(The Art of Loving)에서 사랑은 관심이라 말한다. 사랑을 소중하게 여겨라! 사랑의 관심을 표현하라! 창조주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사람이다(요 3:16).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관심을 독생(獨生)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고 표현하셨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 시실리 섬에 두 고아원이 있었다. 한 고아원은 연합군의 도움으로 풍부한 시설과 음식을 제공받았고, 다른 한 쪽은 그렇지 못했다. 그런데 두 고아원의 유아 사망률을 보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오히려 가난한 고아원의 사망률이 훨씬 낮았던 것이다. 시설이 열악한 고아원의 유아 사망률이 60%나 낮았다! 그 원인이 밝혀졌다. 전쟁 중 세 아이를 잃은 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지극한 사랑(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6) 여기 창조주 하나님의 첫사랑을 보라(창세기 2장 4-14절)

(1) 꽃보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사람!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대상을 향해 누군가 먼저 다가간다. 그래서 부모의 첫사랑·짝사랑은 당연히 자녀이다. 짝사랑은 이렇게 누군가 먼저 하는 대표적인 사랑이다. 이것을 받아줄 때 서로서로 사랑이 시작된다. 그렇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다!

(2) 사람은 하나님의 첫사랑·짝사랑이었다.

피조 세계에서 사람은 분명 하나님의 첫사랑·짝사랑이었다.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하셨다. 안식은 하나님의 계명인 동시에 복이었다. 안식은 복을 주시고자 주신 계명이다. 안식 자체가 복이요 휴식하며 지키는 가벼운 짐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에서 창조 이야기를 마치신 후 다시 사람의 창조 이야기로 되돌아 오셨다. 안식까지 마치시고 창조 이야기는 다 끝났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무엇을 더 이야기하고 싶으신 걸까?

왜 사람 이야기로 다시 돌아온 걸까?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하나님은 사람을 대충 만드시지 않았다. 사람은 하나님 창조의 면류관이다! 동물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단순한 고등 동물들이 진화해서 원숭이를 거쳐 사람이 된 게 아니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께서 사람만큼은 특별 취급하시겠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말로 하면 바로 인간을 사랑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 첫사랑·짝사랑이었다.

(3) 하나님은 첫사랑에게 ‘하나님의 이름’(여호와)을 알려주셨다(창 2: 4)

창조 시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 하나님이었다. ‘엘로힘’은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신의 이름이다(=신의 이름 엘). 이스라‘엘’, 벧‘엘’, 임마누‘엘’의 ‘엘’이 바로 ‘신’이다. 바‘알’, ‘알’라와 같은 이방신도 ‘알’(엘)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자기 백성에게 알리실 때에는 ‘여호와’라고 하셨다. 성경에 여호와라는 명칭은 모두 6,823번 나타난다. 이때 여호와라는 이름은 모두 정확하게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쓰였다. 엘은 평범한 이름이다. 세상에 아버지는 많으나 아무나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나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셨다. 우리와 친히 관계를 맺으시는 여호와로 나타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로 처음 나타나셨다. 여호와는 거룩한 이름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였다. 부르고 싶어도 제대로 부르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괜히 송구스러워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쓰고도 제대로 부르지를 못하고, 그 대신 ‘아도나이’라고 불렀다. ‘아도나이’는 우리 성경에 ‘주님’으로 번역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먼저 커밍아웃하신 분이다. 부모도 아기에게 맨 먼저 자신들의 이름을 알린다. 아기들은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 미숙하지만 엄마·아빠를 부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자신과 수준이 안 맞으면 속으로 ‘넌 알 필요도 없어’ 하며 무시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먼저 여셨다.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내리 사랑’, ‘먼저 사랑’이, 사람이 범죄한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이유가 되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바울은 로마서(10장 9절)에서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님이라고 시인하라’고 했다. 즉 창세기 2장 4절의 여호와 하나님(=아도나이 하나님) 즉 주님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라고 분명히 못 박고 있다. 나의 주님이 바로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4) 하나님은 사람을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사랑으로 지으셨다

사람은 본래 흙이었다. 흙이 가진 17가진 주요 성분이 사람 몸에도 그대로 있다. 사람도 다른 생명처럼 육체다. 육체로는 다른 생물과 다를 게 별로 없다. 생령이 아닌 죽은 육체는 그래서 그루터기나 다름없다. 따라서 사람은 썩으면 흙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사람은 다른 생물과 분명 다르다. 사람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되었다(창 2:7).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빚어 지으셨다(히브리어 ‘야차르’). ‘야차르’는 토기장이가 흙으로 무엇을 만들 때 쓰는 단어다. 토기장이는 의미 없이 아무렇게나 질그릇이나 토기를 만들지 않는다. 분명한 목적이 있다. 특별한 목적! 예술가가 아무렇게나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이란 성경에 보면 첫째 인간의 찬양을 받기 위함이요(사 43:21)이요, 둘째 하나님은 야곱을 ‘야차르’하였기에 잊지 않겠다(사 44:21) 하셨고, 심지어 복 중에 ‘야차르’하기 전에 예레미야를 알았다(사랑했다)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시면 하나님께서 사랑한 것(렘 1:5)이다. 하나님께선 ‘나는 아이라 말할 줄 모른다’고 변명하는 예레미야를 안다(사랑한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명도 ‘야차르’(시 139:16)하셨고 악인도 ‘야차르’(왕하 19: 25)하셨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야차르’하셨다. 가정을 ‘야차르’하셨고, 교회를 ‘야차르’하셨다. 선한 목적의 ‘야차르’였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것은 선한 뜻에 맞게, 악한 것은 악한 것에 맞게 ‘야차르’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는 하나님의 특별하고 선하신 목적이 있다.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여러분에게 가정과 교회를 주신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선한 ‘야차르’를 믿는 다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5) 여기 하나님 사랑의 절정, 십자가를 보라!

그리스도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다. 십자가는 망가지고 자존감을 상실한 인간의 모든 것을 소중하게 회복시킨다. 십자가 없이 인간의 참된 자존감 회복은 없다. 십자가를 만날 때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소중함도 회복된다. 그래서 창조는 사랑이다. 그 정점에 사람이 있다. 그렇게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꽃 사람이여! 사랑하고 사랑받으라! .

사랑 풍경1. 사람

너 사람아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는 사람과
고통을 즐거운 등산으로 여기는 사람과
사랑 받으려 사는 사람과
사랑하다 죽으려는 사람과
사람은 그렇게 어울려 서로 가끔 잽을 날리고
행복 바람을 붙잡듯 살다
공평하게 흙으로 돌아가는 것

사람이 결코 피하지 않으려는 것
사람이 늘 피하려는 것
그것으로 인해 서로
가슴에 상처 하나씩 품고
공평하게 아파하고 그리워하고 즐거워하고
사랑 하나 붙들고 평생을 살다가
통속의 일생을 마치는 것을
그래도 하느님의 창조의 꽃
너 사람아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